인기 미드서 K드라마 향기가 … CJ 美현지 작품 1호 호평
가능성. 마치 운명을 점지해주는 신탁과도 같은 하나의 단어로 내 인생의 잠재력을 알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애플TV+의 오리지널 시리즈 '더 빅 도어 프라이즈'(운명을 읽는 기계)는 이런 상상을 풀어낸 10부작 드라마다. 적당히 행복하게 굴러가는 듯 보이던 미국의 한 마을에 돌연 의문의 기계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은 오락실 부스처럼 생겼는데, 동전을 넣고 개인정보를 입력하면 사람마다 다른 단어가 적힌 카드가 나온다. 언뜻 '오늘의 운세'와 비슷해 보이는 '당신 인생의 가능성(Your Life Potential)'. 기계가 내뿜는 신비로운 푸른빛에 매료된 사람들은 카드를 받아든 뒤 제각기 선택을 한다. 막연히 꾸던 꿈을 향한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평탄할 줄만 알았던 일상이 불안과 의심으로 뒤덮일 수도 있다.
마을 주민들 간 코미디와 공상과학, 철학적 질문이 살짝살짝 곁들여진 보기 편한 가족 드라마다. 골든글로브 수상 작가인 데이비드 웨스트 리드가 M O 월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각본을 썼고, 배우 크리스 오다우드가 40대 가장인 주인공 더스티 역할을 맡았다. 영미권 콘텐츠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비평가 평점 94점, 일반 관객 평점 80점의 호평을 기록하고 있다. 매주 1화씩 공개되고 있어 다음달 17일에야 시즌1이 종영되는데, 일찍이 '가능성'을 인정받아 시즌2 제작이 확정됐다.
이 흥미로운 작품은 '한국 제작사가 만든 첫 미국 드라마'이기도 하다. 한 해 30여 편의 드라마를 쏟아내는 국내 최대 규모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이 2019년 세운 미국 인터내셔널 지사에서 제작해 방영한 첫 작품이다. 2021년 SLL도 미국 제작사 '윕(Wiip)'을 인수하는 등 우리나라 대형 콘텐츠 제작사의 해외 거점 진출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다.
'더 빅 도어 프라이즈'는 스튜디오드래곤의 모회사 CJ ENM이 현지 제작사 스카이댄스에 지분투자를 하면서 파트너십을 맺었고, 스카이댄스 측이 협업을 제안해 기획이 시작됐다. 안수정 스튜디오드래곤 글로벌사업담당 부장은 "한국 드라마는 미주·유럽 지역에서 존재감이 약해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했다"면서도 "지금은 'K프리미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변화를 실감한다"고 했다.
K콘텐츠가 국경을 범람하며 세계적 돌풍을 일으키는 지금, 국내 제작사가 미국 현지화에 나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드라마 기획·개발에 참여한 스튜디오드래곤 글로벌사업담당 손민정 책임프로듀서와 안수정 부장, 미국 인터내셔널 지사의 하세라 프로듀서에게 서면으로 물었다.
"콘텐츠는 그 속성상 생명이 있습니다. 한곳에 머물러 있기보다 여러 나라, 다양한 과정을 거치면서 또 다른 콘텐츠를 낳기도 합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해 유수의 파트너와 함께 일하는 건 전 세계의 더 많은 시청자에게 통용되는 콘텐츠를 만드는 법을 체득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안수정 부장)
서로 다른 콘텐츠 제작 공식이 만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은 충분히 엿보인다. 특히 북미 시장의 콘텐츠 제작 환경을 체득한 건 큰 성과다. "한국은 제작사가 방송국·플랫폼에 작품 피칭을 하지만 미국은 작가와 감독이 직접 피칭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또 미국은 시즌제로 작품을 준비하기 때문에 서사뿐 아니라 시즌 전체의 핵심 콘셉트와 메시지를 기획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손민정 책임)
약 2년에 걸친 기획·제작 과정에서 스튜디오드래곤의 노하우가 녹아든 부분도 있다. 바로 '캐릭터 중심 서사'다. 장소와 등장인물 모두 그야말로 미국적이지만, 형식에 있어서 30분 안팎의 매 회차를 한 인물에 집중한 옴니버스로 구성한 건 한국 제작사가 짚어낸 포인트다.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의도적인 기획이라고 손 책임은 설명했다. 또 안 부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보편적 이야기이자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대입하기에도 좋은 포맷"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현지화는 K콘텐츠 지식재산권(IP)에 대한 높은 책임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인기 드라마 '호텔 델루나' '사랑의 불시착'의 현지화 공동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유니버설스튜디오와 '설계자들', CBS 스튜디오와 '마스터마인드' 등도 연내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진행 중인 프로젝트만 20여 개에 달한다.
하 프로듀서는 "원작의 리메이크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오리지널 콘텐츠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며 "자칫 문화적 이해력이 부족할 수 있는 이들에게 전적으로 작품을 맡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작가와 배우 등 아시아계 미국인 창작자와 아티스트를 육성할 수 있는 기회"라고 의의를 더했다.
안 부장은 "작품의 결과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현지 파트너 제작사를 신중히 물색하고 있다"며 "스펙터클한 규모의 작품은 스카이댄스, 캐릭터 드라마·휴먼 장르는 피프스시즌, 스릴러·공포물은 블룸하우스와 각각 진행하는 등 맞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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