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포비아'에 갭투기 주범이냐 주거사다리냐
전세유형·전세대출이 야기한 '갭투자'?
전세사기 사태로 '전세 폐지' 요구 나와
서민주거사다리 기능 어쩌고…해법 있나
서민들의 대표적인 주거사다리로 손꼽혔던 '전세'가 사기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일부 집주인들이 전세를 수단으로 무리하게 '갭투자' 했다가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서 사태가 불거지고 있다.
정부가 피해자 구제 방안 마련에 나섰지만 피해 사례가 워낙 제각각이라 '묘수'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자 전세 근본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전세 유형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월세→전세→자가' 주거사다리였는데..
전세는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맡기고 거주한 뒤 계약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 주택임대차 유형 중 하나다.
흔히 전세를 '제도'로 알고 있지만 집이 있는 사람과 집을 살 자금 여력이 부족한 사람 간 상호 이익이 맞아떨어져 생긴 '관행'이다. 임대인 입장에서 전세는 집 살 때 부족한 자금을 전세보증금으로 충당할 수 있다. 대출 한도나 이자가 있는 주택담보대출과 달리 '무이자대출'로 사실상 사금융에 해당한다.
임차인도 월세보다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월 이자를 내는 편이 유리하다. 물론 금리가 높은 때엔 월세가 더 저렴할 수 있지만 통상 전세대출은 정책상품이 많고 다른 대출에 비해 이자가 낮은 편이다.
전세대출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규제도 받지 않고, 보증회사의 보증서를 담보로 이뤄지는 은행 대출은 HUG, SGI,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보증기관이 최대 100%를 보증한다.
당장 가진 돈이 별로 없어도 전세자금 대부분을 대출로 충당할 수 있는 셈으로, 전세가 자가 마련의 디딤돌로 활용되는 이유다. 가령 목돈이 없는 사회초년생 때는 보증금이 적은 월세를 살다가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 전세로 전환, 목돈을 모아서는 자가 구매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러나 전세가 '갭투자'의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각종 부작용이 생기자 전세 근본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부동산 상승기 때 무리하게 갭투자를 해서 집을 샀던 사람들이 부동산 하락기를 맞으면서 기존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례가 속속 나타났다.
특히 다세대주택 등 시세를 확인하기 어려운 빌라 시장에선 시세를 부풀려 깡통 전세를 만든 무자본으로 집을 사들이는 '무자본 갭투자'가 성행했다. 지난해 하반기 사회적 이슈가 된 '빌라왕' 사태가 대표적이다.
전세 사라진다?…"대출 먼저 손봐야"
전세사기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가 피해자 구제방안 마련에 나섰지만 뾰족한 해법은 없는 상황이다. 전세보증금 미반환 및 사기 유형이 제각각이라 피해자 모두를 구제할만한 대책이 나오기 어렵고, 그렇다고 정부가 전액을 보상해주기엔 형평성 및 법질서 교란 등의 문제가 생겨서다.
이에 시장에선 전세 자체를 손보거나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금리 인상, 전세사기 문제 등으로 '전세 포비아'가 확산하며 월세 비율이 높아진 만큼 전세의 역할이 작아지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들고 있다.
부동산 정보제공 업체 '경제만랩'이 서울부동산정보광장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 1분기 서울 빌라 전·월세 거래량 2만7617건 중 전세 거래량은 1만4903건으로 전체 거래의 54.0%를 차지했다. 이는 서울부동산정보광장이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지난 2011년 이후 1분기 기준 가장 적은 수준이다.
그러나 전세가 임대차 시장에서 오랜 시간 자리를 잡아온 데다 주거사다리 등 순기능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사실상 폐지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김성환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갭투자'라는 명칭이 붙어서 그렇지 전세는 원래 적은 돈으로 주택을 마련한 다음 돈을 모아서 실거주하는 패턴의 전형적인 내집마련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세사기 사태 등으로 전세 수요가 줄어들긴 하겠지만 지금까지 주택시장에 미쳤던 영향을 생각하면 쉽게 없애기도, 없어질 수도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대신 전세자금대출 축소, 빌라 시세 투명화 등 전세를 둘러싼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전세는 사인간 거래기 때문에 제도권이 아니지만 전세자금대출은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전세자금대출 규모가 크다 보니 가격에 거품이 생기고 부채비율도 커지고 있어 여기부터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은행권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2018년 9월 64조원이었으나 2022년 10월엔 171조9000억원으로 4년만에 세 배 가까이 늘었다.
그는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상황인데 이대로 두면 호미로 막을 것을 포크레인을 가져와도 못 막게 된다"며 "점진적으로 전세대출 규모나 비율을 줄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성환 부연구위원은 "빌라의 경우 시세 파악이 어려워 전세사기의 표적이 됐다"며 "최근 주택 감정평가액을 추정하는 오토밸류에이션 모델이 많이 도입됐는데 이런 시스템 등을 도입해 일반인도 빌라 등 시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신화 (csh@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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