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홀린 ‘악마의 놀이터’...박해수·원진아는 없었다
‘악의 평범성’ 그린 메피스토役 박해수
악인 완벽 소화...“치유·위로 주고파”
‘도덕성·선의 상징’ 그레첸役 원진아
생애 첫 연극...“매일 배움의 시간”
그곳은 ‘악마’의 놀이터였다. 부른 적도 없는데 튀어나와 인간을 희롱한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어 서늘하고 섬뜩하다. 꾹꾹 눌러둔 본능이 꿈틀거릴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존재”(연극 ‘파우스트’ 중)였다. ‘노력하는 존재’들의 욕망이 빚어낸 ‘지옥의 협연’. 그 안엔 잔혹한 쾌감과 아찔한 충동이 공존했다. ‘악마’는 누구도 아닌 “내 안의 또 다른 나”(양정웅 연출)였으며, ‘욕망’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괴테가 일생을 걸고 쓴 ‘파우스트’에 지금 이날들을 모조리 걸어버린 두 배우가 있다. 절대악 메피스토를 맡은 박해수와 절대선 그레첸을 연기하는 원진아다. 두 사람은 연극 ‘파우스트’ 연습실의 모범생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연습 내내 즐거운 악몽에 시달렸다”는 박해수는 연습실에 일등으로 출근했다. 원진아는 “30~40분 정도 연습에 일찍 갔는데, 언제나 10~20분 차이로 박해수 선배님이 먼저 와있었다”고 했다.
‘성실한 욕망’은 무대로 증명됐다. 빈틈없는 이음새로, ‘파우스트’(4월 29일까지, LG아트센터)는 연일 전석 매진을 기록 중이다.
▶ 신이 난 아이처럼 세상을 주무른 악마...박해수의 욕망=새까맣게 그려진 음표와 무질서한 악기를 진두지휘하는 마에스트로였다. 빛이 사라진 세상에 피어난 가장 짙은 어둠. 그는 ‘인간의 욕망’을 잡아끌어 세상을 채색한다. ‘존경받는 인간’ 파우스트를 두고 ‘신과의 내기’를 벌이는 악마 메피스토. 악마의 눈은 신이 난 아이처럼 반짝였다.
‘박해수의, 박해수를 위한, 박해수에 의한’ 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대에 서있는 에너지를 잊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고 했다. ‘오징어 게임’부터 ‘수리남’까지.... ‘넷플릭스 공무원’은 결국 무대 위에서도 보여줬다. 5년 만에 연극으로 돌아온 박해수는 이 무대의 ‘완벽한 주인공’이었다. “대사가 참 어려웠어요. 그러면서도 많이 와닿았어요.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지금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고요. ‘파우스트’가 그리는 악마는 굉장히 논리가 강하고 가치관이 분명한 어떤 인물처럼 보였어요.”
박해수의 ‘메피스토’는 흥미롭다. ‘악마’로 대상화됐지만, 그는 “악의 평범성에 주목”했다. ‘메피스토가 지금 시대의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하나의 질문이 박해수만의 악마를 만들었다. “세계 최고의 보험 설계사, 혹은 보증인, 아니면 보호자, 어쩌면 좋은 친구, 애인, 선배.... 어느 시대에나 악한 인간형은 존재하잖아요. 지금은 더 많아졌고요. 악의 시초, 악의 씨앗이 어떻게 뿌려졌느냐에 집중하는 것이 저의 출발이었어요.”
“‘폭주기관차’처럼 따라다니는 욕망”은 악마 메피스토의 또다른 얼굴이다.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는 맹수”였고, 거대한 세계를 매만지며 조물주를 꿈꾸는 권력자였다. 무대 위 박해수는 손짓, 발짓 등 모든 행동에 연기를 심었다. “무대에서 신체 연기는 굉장히 중요해요. 언어도 전달을 위한 매개체이지만, 몸짓이 가진 에너지가 크니까요. 키가 190㎝가 넘는 청바지 차림의 유명 지휘자의 동작을 참고했어요.”
최근 몇 년은 박해수에게 많은 변화가 있던 해다. 그가 출연한 작품들이 OTT를 타고 세계 무대로 향했다. 전 세계의 생생한 반응을 들었던 지난 “2년의 시간이 무척 신기했다”고 한다. 박해수의 ‘욕망’은 매일의 무대에서 이뤄지고 있다.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고, 때 마침 ‘파우스트’가 찾아왔다”고 했다. ‘노력하는 배우’의 욕망은 아직 멈추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었던 시간들이 제겐 또 다른 숙제로 남아있어요. 계속 해서 도전하고 싶어요. 문화가 사람들에게 치유와 위로의 힘을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요. 저 역시 그런 배우이고 싶어요. 먹먹함과 충만함, 위로를 주는 배우요.”
▶원진아, 두려움 없는 도전...치유로 이끈 시간들=생애 첫 연극이었다. 그럼에도 무대에 선다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에게 이 무대는 ‘구원의 동아줄’이었는 지도 모른다. 2015년 데뷔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MBC)에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부지런함으로 눈도장도 찍었다. 그럴 즈음이었다. 원진아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스스로 나를 배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연기를 계속 해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연기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가 될 만한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고요.”
유인촌 박해수 등 대선배들의 등판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겁도 없이, 제가 얼마나 못할지, 민폐를 끼칠 수도 있을지 걱정은 제쳐두고 이건 하고 싶더라고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면 너무 배 아플 것 같았어요. 그건 못 보겠다는 욕심이 생기자 안할 수가 없었어요.”
결정을 내린 뒤에야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무지의 판단’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연습 날부터 우려는 현실이 됐다. 몸은 움츠러들었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2~3주간 밑바닥을 봤어요. 제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연기를 처음 하는 사람 같더라고요.”
원진아의 얼굴은 작품 내내 생생하게 변한다. 천진하고 순진한 소녀에서 사랑에 솔직한 얼굴, 그러다 나락으로 떨어져 절망과 고통을 쏟아내는 인간을 그린다. 원진아는 “진짜 감정”들을 꺼내는 것을 일순위로 뒀다.
“우리끼리 약속한 서사를 믿고 상상하며 집중했어요. 객석이 가깝기에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들켜버려요. 한 줄의 대사를 하기 위해 그 이전의 말이나 상황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사라지지 않은 감정의 자국들로 간극을 메우려 했어요.”
쉽지 않은 도전은 그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고 있다. 그는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나아지지 않는다고 느꼈던 시간이 길었다”며 “내 연기가 벌써 바닥나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파우스트’와 함께 하며, 원진아의 매일은 “배움의 시간”이 되고 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에 결핍이 채워진다.
“더 좋은 배우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결핍어요. 첫 연극을 통해, 다시 무(無)에서 시작하다 보니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보여 충족감을 주더라고요. 더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 받아, 이젠 배우 해도 되겠다는 마음을 회복했어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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