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위기, 쿠바 미사일 사태때 같아… 韓, 핵우산 외 독자대응력 갖춰야”[파워인터뷰]

이제교 기자 2023. 4. 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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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인터뷰 -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현재 북핵 대응, ‘억지’ 에 중점
‘한국형 핵공유’ 수준의 발표 등
한미정상회담 중요 성과물 기대
한미일 핵계획그룹도 확장해야
동북아 한 · 미 · 일 - 쿼드 4개국
美, 두축 안보협의체 연대 구상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지난 20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 사옥 인근을 걸으며 “미·중 갈등이 깊어지면서 역사가 변곡점을 맞고 있다”고 언급하는 등 최근 국제정세를 평가하고 있다. 백동현 기자

인터뷰 = 이제교 정치부장 jklee@munhwa.com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1559일간 재직했다. 민주화 이후 최장수 외교부 장관으로 탄핵으로 청와대 열쇠를 넘겨주기까지 박근혜 정부를 지켰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모든 외교·안보정책이 180도 뒤집히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그가 꿈꿔왔던 한반도 미래에 대한 ‘미완의 아쉬움’ 때문인지, 국제 열강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남다르다. 윤 전 장관은 “미·중 갈등이 깊어지면서 역사는 중대한 변곡점을 맞고 있고, 윤석열 정부는 그 전면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 3국의 전체주의 연대를 견제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한·미·일과 호주, 인도를 엮는 협의체적 질서가 탄생하는 국면이라는 것이다. 과거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으로 표현되는 균형외교의 수명이 끝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제정세는 시시각각 변하고 요동친다. 정답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국가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26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 사옥에서 윤 전 장관을 만났다.

―먼저 일본 얘기부터, 2015년 위안부 합의와 2023년 강제징용 해법의 진보진영 반응은 데칼코마니 같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발표는 한·일 간의 정치적 합의였다. 발표도 공동합의문으로 하지 않고 각각 했다. 강제징용 해법은 성격이 다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법적 해석 문제다. 대법원은 2012년 ‘국가 간 외교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할 수 없다’고 판결했고, 2018년에는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도 확인했다. 이후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등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을 매각, 현금화하는 문제가 현실로 터져 나왔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1965년 협정의 근간이 흔들리는 사안이었다. 한국에 화이트 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배제를 가할 정도로 위안부보다 더 중대한 사안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있었지만 미루기보다는 해결하는 쪽을 선택했고, 3자 대위변제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본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일 과거사 문제는 잘못 건드리면 독이 된다고 조언합니다.

“한국이 일본기업 자산매각에 나서면 한·일 관계의 시한폭탄이 터지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해 국제사회가 원하는 한·미·일 협력, 인도·태평양 지역 협력이 물 건너가는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된다. 책임 있는 정부는 그런 상황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미·중 갈등이 깊어지면서 역사는 중대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 모든 것이 바뀌는 지각변동이 발생하는 시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대전환의 한 사례이다.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미·중 경쟁은 그 대전환의 중요한 핵심 요소다. 북한 핵 문제는 다모클레스의 칼(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칼, 절박한 위험을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도 같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북한 핵 위기와 공급망 위기, 경제 금융 위기, 에너지 위기 등 모든 위기가 동시에 터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대처할 가장 좋은 체제는 일단 한·미·일 안보 경제 협력체제이고, 인도·태평양 지역 협력 체제이다. 윤 정부가 먼저 결단을 내렸고, 일본이 호응할 순서다. 국제정세를 보면 언제까지 과제를 미뤄둘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현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당시 외무상이 파트너였지요.

“기시다 총리는 온유하면서 합리적인 스타일이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스타일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는 2013년부터 3년 동안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에 대해 역사 수정주의 입장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따라서 한국도 상당히 강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카운터 파트가 기시다 외무상이었다. 기시다 외무상과는 1년에 최소 6∼7번은 만났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차선책’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일본은 책임 인정을 했고 총리 명의로 공식 사죄를 했고 처음으로 정부 예산으로 치유금을 냈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합쳐지면서 피해자들이 요구했던 내용에 충족되는 상황에 접근했다. 2012년 사사에 겐이치로(左佐江賢一郞)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제안한 이른바 ‘사사에안’이나 아시아 여성기금 방안보다 훨씬 더 진전된 안이었다. 일본 진보인사들도 상당히 잘된 방안으로 평가하고 ‘박근혜 대통령하고 아베 총리가 결단을 내렸다’고 얘기했었다. 사실 아베 총리는 합의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일본 우파에서 상당한 반대가 있었고 그 반대를 누그러뜨려 준 사람이 기시다 외무상이었다. 기시다 외무상이 주된 역할을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가 뒤집혔는데, 일본에서는 한국이 골대를 움직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태스크포스(TF)도 구성했는데, 있지도 않은 문서를 이유로 절차적 내용상 하자가 있다는 식으로 몰고 갔다. 이면 합의는 전혀 없었다. 보통 어떤 합의를 하게 되면 그 자체가 불가역적이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 당시 생존하신 할머니들이 46명인데 그중 4분의 3에 근접한 35명 정도가 한·일 합의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강제징용도 마찬가지로 3분의 2 정도가 3자 대위변제 해법을 받아들였다.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뒤집으면서 일본에서는 한국과의 협상 무용론 불신이 커졌다. 정권이 교체되면 무용지물이 되는데 협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골대론인데, 기시다 내각은 윤 정부의 일본에 대한 ‘담대한 접근’(bold initiative)을 보면서 진정성을 느낀 것 같다. 강제징용 해법의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변곡점에 놓여있다고 언급했는데, 한·일 갈등과는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나요.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이 지각변동할 때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탄생시켰다. 미국 입장에서 아시아·태평양, 인도·태평양 지역을 보면 동북아시아에는 한국과 일본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주, 서남아시아에는 인도가 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한국, 일본과 쿼드의 네 나라를 두 축으로 하는 안보협의체 연대를 구상하고 있다. 그중에 한 축인 한·미·일 3개국이 작동하지 않으면 기존의 양자 동맹으로 움직여야 하므로 상당히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3개국 협력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한·일 갈등이고, 과거사 문제였다. 오바마 행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윤 정부의 한·일 관계 적극적 개선은 한·미·일 안보협력강화로 진화할 시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지난 20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 편집국에서 진행한 파워인터뷰에서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과 별도로 독자적인 대응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백동현 기자

“지금은 역사적 변곡점… 日과 전략적 동행 · 美중심 인태체제 합류 필수”

공급망 · 금융 · 에너지 위기 가속
한미일 3개의 발로 걸어야 극복
‘징용 3자변제’ 결단으로 돌파구
김대중 - 오부치 선언도 미래강조

美, IRA · 반도체법 자국우선주의
‘기술분야 애치슨 라인’ 그려져
新생태계 대응 외교 역량 필요
尹, 바이든에 동맹배려 요구해야

―야당의 한·일 관계 개선 반대는 국제정세 인식 부재인가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21세기를 향한 파트너십에 대한 한·일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4반세기 전에 4반세기 후를 내다보고 미래 파트너십을 언급한 것이다. 거기에 나온 5개 분야 합의와 40개의 별도 행동조치는 사실 지금도 대부분 유용한 것들이다. 올해가 김대중-오부치 선언 25주년이고 2년 후면 한·일 수교 60주년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1963년 엘리제조약이 한·일 수교 협정에 해당된다면 2019년 신엘리제조약은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비슷하다. 한국민들에게는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프랑스처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제 균형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급변하는 세계에서 국익을 놓칠 수 있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윤 대통령의 최근 외신 인터뷰를 보면 너무 솔직하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북한 핵미사일 위기가 고조되고 있고 국민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과 별도로 독자적인 상당한 정도의 대응능력을 갖춰야 한다. 우크라이나 언급은 윤 정부가 강조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 입장에서 러시아가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하거나 양민 학살에 나설 경우 한국도 좌시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로이터통신 인터뷰 내용은 당장 한국이 뭘 하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의 가정법이자 조건적 상황에 대한 원론적 언급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을 겁박하고 나온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수년 동안 국제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힘에 입각해서, 무력에 의해 파괴하거나 바꾸려고 하는 시도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2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올 핵우산, 확장억제 강화 방향은 무엇이라고 전망하나요.

“나토는 전술핵을 5개국에 배치하고 배치되지 않은 나라까지 포함해 30개국을 상대로 핵계획그룹(NPG)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한·미 간에 하고 있는 차관급 회의를 격상할 것으로 본다. 최근 미국의 싱크탱크나 의회 자료, 국방부 국방전략보고서(NDR)를 보면 한·미·일 NPG 체제로 확장을 시사하는 내용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미국은 한·미·일 NPG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3자, 4자 NPG 체제는 북한에 강력한 압박수단이 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획기적인 북핵 대응 수단이 된다. 외교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한·미 간에 돌이킬 수 없는 빌트 인 스트럭처, 붙박이 북핵대응장치와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내·외부에 강조해 왔다. 보수와 진보 어떤 성향의 정권이라도 이념에 따라 국민 정서를 이용해 안보를 흔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미·일 NPG 체제는 궁극적으로 아시아판 나토, 다자간 지역안보체제로 진화될 것으로 보나요.

“북핵은 5D, 즉 억지(deterrence), 방어(defense), 격파(defeat), 외교(diplomacy), 낙담시키기(dissuasion)가 중요하다. 지금은 억지에 가장 중점을 두는데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한·미 동맹을 통한 핵우산 강화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형 핵공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발표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소다자간 핵기획 그룹 창설 등 제2의 옵션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2016년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담에서 확장억제 전략협의체(EDSCG)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임’(DIME·Diplomacy Information Military Economy)이라고 하는 외교·정보·군사·경제를 포괄하는 논의기구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 EDSCG를 중단시켰다. 지금 북한은 전술핵 대량 실전배치 임박 단계다. 그렇다면 ‘미국이 핵우산을 실제로 가동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게 되는데, 이번에 강화되는 한국형 확장억제조치가 이 문제를 상당 부분 완화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제2의 옵션은 전술핵 재배치나 자체 핵무장도 의미합니까.

“한·미 정부는 물론 정치권, 학계에서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유는 첫째, 미국의 핵우산 수단이 다양하기 때문인데, 미국은 전술핵과 핵무기, 첨단 무기 같은 전략자산이 동북아에서 전술핵 재배치 이상으로 강력하고 신속하게 전개될 수 있다고 한다. 둘째는 전술핵을 지상에 배치했을 때 타깃이 된다는 문제도 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주한미군 2만8500명이 주둔하는 한국은 그 자체가 확장억제의 확실한 증거로 미국과 운명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이 이스칸데르 스타일의 전술핵 단거리 미사일을 대량으로 실전 배치하는 상황이 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지는 않더라도 전술핵 재배치도 염두에 두면서 핵우산이 가동될 수 있도록 미국과 확장억제 강화를 하는 방안을 계속 모색해야 한다.”

―진보진영에서는 남북대화가 한반도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지난 기간 북한의 행태를 보면 핵 포기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미국 주류의 생각이다. 윤 정부는 북한의 행동변화 단계에 따라 제재를 완화하는 ‘담대한 구상’을 이미 내놓았다. 비핵화 협상을 염두에 두면서 억지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발간된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서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김정은 정권은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과거에 미국이 공식 문서를 통해 이처럼 강력한 경고를 내놓은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악의 축’ 정도였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량이 100개 수준에 근접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핵군축 협상을 하자고 나올 것이다. 비핵화 협상과 핵군축 협상은 성격이 다르다. 대화의 문을 닫지는 않지만 확장억제를 중심으로 북한이 핵을 못 쓰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국은 한·미 동맹 강화 상황이 달갑지 않을 텐데,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전합니다.

“중국은 미국과의 경쟁을 장기적으로 본다. 100년의 혈투라고 전망하는 분석도 있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 그리고 한·미·일 협력 강화, 더 나아가 인·태 협력체 발전이 신경 쓰일 것이다. 모두 중국을 견제하려는 수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태도로 나올 수도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LG 디스플레이 현지 공장에 시찰도 가고 한·중·일 정상회의 재개를 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다자주의적 세력규합이 심상치 않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중국의 공세적 태도, 국제질서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을 해야 한다. 국제규범에 맞지 않는 중국과는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은 있나요.

“북한의 급변사태 논의는 수년 전부터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지 벌써 11년이 지났고, 핵무기가 정권 생존에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중국이 미국과 경쟁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면서 북한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양상이다. 북한도 중국 카드와 러시아 카드를 쓰면서 영리하게 행동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을 앞마당으로 삼아 남한을 압박하고 미국과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 동북아의 판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거의 지각변동 수준이다. 그만큼 위기도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투면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지도자가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는 현재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처럼 미국 우선주의가 강해지는 것은 아닌가요.

“주제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해피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끝났다’고 말했다. 공급망은 세계화를 전제로 짜였는데 세계화가 파편화하면서 공급망 생태계가 재편되고 있다. 많은 나라가 자국 중심주의로 돌아서고 있고, 당분간은 바꾸기 어려운 구조일 것이다. 한국은 산업이나 기업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만 균형 감각을 갖고 볼 필요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경제안보=국가안보’ 캐치프레이즈와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IRA와 반도체법이 대표적인데, 이 두 가지를 내세워 내년 재선에 도전할 것이다. 한국은 동맹에 대한 배려를 요구해야 한다. 신흥기술과 첨단 기술 분야의 경우 애치슨 라인처럼 ‘바이든 라인’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정학과 기술이 결합된 ‘지기학’(Geotechnology)적 개념인데, 새로운 생태계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한국의 이해가 최대한 반영되도록 외교적 협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게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한·미 동맹이다. 똑같은 얘기를 일본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지금은 한·일 유사 입장국의 연대가 강하지 않지만 일본을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될 요소가 많다. 문 정부는 지난 몇 년간 일본과 헤어질 결심을 했지만 윤 정부는 동행할 결심을 유지해야 한다. 판을 크게 보면서 인·태 지역과 세계를 보아야 한다.”

―탄핵으로 못 끝낸 박근혜 정부 외교 정책에 대한 아쉬움도 많을 텐데요.

“신뢰외교라는 철학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등으로 구현시키고자 했었다. 중동의 평화협상과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벤치마킹한 구상이었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미·중 균형 관점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확고한 동맹에 입각한 동반자 관계를 중요시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과가 있더라도 다른 의견을 가진 입장에서는 나머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역대 지도자들과 달리 임기 초기부터 외교에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였다. 외교부를 중시하면서 스스로 외교 대통령이라는 인식으로 일했다. 한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었던 만큼 세계 각국 정상들이 항상 만나고 싶어 했던 인사였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국제사회에서 많은 의장국을 맡았고 적극적으로 다자외교에 나섰다. 그런 부분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아쉽다.”

―1981년 이후 최장수 외교부 장관으로서 조언을 한다면요.

“한국 외교에는 난제란 난제는 모두 모여 있다. 박근혜 정부도 그랬고,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엄청난 위기로 이어진다. 하루에도 2∼3개씩 갈등 현안이 터진다. 외교정책의 위기는 큰 틀의 전략뿐 아니라 악마라고 하는 세부사항에 있는 경우가 많다. 본문에는 상대방과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문구를 피하지만 부속문서에는 미래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다. 상호 연계된 복합이슈들을 전략적으로 접근해서 미래 국익의 단초를 남겨놓아야 한다. 양자 관계가 벽에 부딪힐 때는 다자 관계로 뚫는 것도 방법이다. 쉽고 편한 고민이 없는 외교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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