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를 걷다 서산 팔봉산] 362m 단신이지만 산세는 금강산
충남 서산 팔봉산八峰山은 낮지만 수려한 산이다. 해발 362m의 산이 뿜어내는 기세는 실로 대단하다. 울창한 송림과 무수한 기암괴석으로 치장해 서해 가로림만 앞에서 하늘을 뚫을 듯이 불끈 솟아 있다. 산 곳곳에는 우럭바위, 거북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고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를 방불케 하는 3봉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가로림만을 비롯해서 서해 앞바다가 펼쳐진다. 그러한 풍광은 중국 위왕의 세숫물에 8개의 봉우리가 비쳐 그 산세가 중국에까지 떨쳤다는 고흥 다도해의 보석인 팔영산이나 홍천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팔봉산에 못지않다.
"이름에 '팔八' 자가 들어간 산치고 수려하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어요."
"경관도 마찬가지죠. 관동팔경, 단양팔경, 양산팔경 등을 비롯해서 이젠 거의 모든 지자체마다 8경이 있잖아요. 사람도 팔자가 중요하고요."
비구름 헤치며 봄맞이 우중 산행
지난 3월 12일 일요일에 서산 팔봉산 양길리 주차장에서 들어섰다. 봄비가 세차게 내리는 와중에도 대형주차장엔 관광버스 10여 대를 비롯해서 수십 대의 승용차가 들어차 있다. 비 온다는 예보에도 새벽부터 김포에서 달려온 강은호·박은정, 이상화·문소이 부부와 합류해 인사를 나눈다. 비 그친 뒤 산행을 할까 의논하다 우르르 몰려가는 인파를 보고 뒤따라 나선다.
"서산 팔봉산이 대단하네요. 비 오는 데도 불구하고 수백 명이나 산행을 왔네요."
"그러게요. 우중산행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팔봉산은 주차장에서부터 그 위세가 대단하다. 침봉을 이룬 1·2·3봉이 훤히 올려다 보인다. 비구름에 휘감긴 모습은 실제보다 훨씬 더 높고 위태로워 보인다. 등산안내소 앞엔 팔봉산과 아라메길 안내도가 같이 세워져 있다. 서산 아라메길 중 4구간 일부가 팔봉산 들머리와 살짝 겹친다. 아라메길 4코스는 구도항, 주벅, 장구섬, 노루목, 팔봉갯벌체험장, 호리항, 호덕간사지, 마루지, 방천다리 등을 지나는 길이다.
들머리의 숲길은 걷기 좋은 아늑한 송림이다.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너른 숲이 이어진다. 초입에 세워진 커다란 시비가 일행들의 발길을 세운다. 조선 후기 서산의 여류시인인 오청취당의 '스스로 탄식하며'라는 시비가 서 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정숙함엔 합당치 않으나
시는 울적한 회포 논할 수 있고
술은 능히 맺힌 근심 풀어낸다네.
세상 일 들릴 땐 몰래 귀를 막고
속된 것 볼 때면 머리를 긁적이지.
오직 한가로이 자적함일 뿐
고아한 취미는 오직 한가로이 자적함일 뿐
이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인생의 희노애락과 처세에 관한 시다. 비 오는 와중에도 시 한 편을 전부 읽은 강은호씨가 산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뜻풀이가 되겠다며 개작을 하고, 이상화씨가 화답을 한다.
"산행은 울적한 회포 논할 수 있고 술은 능히 맺힌 근심 풀어낸다네."
"비 오는 날 막걸리와 파전이 더욱 간절해지네…."
서해 가로림만이 눈앞에 펼쳐지는 노적봉
등산로는 울창한 송림 아래 커다란 돌탑과 약수터를 지나면서 완만하고 너른 흙길이 점차 가팔라지며 1봉과 2봉 사이 안부에 이른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어디로 갈지 우왕좌왕 서 있다. 왼쪽 능선 끝에 자리한 1봉(210m)에 올라선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곡식단처럼 쌓인 모습이 감투를 쓴 것과 같다 하여 노적봉과 감투봉으로 불린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정상석 앞에서 기념촬영만 하고 내려서는데, 사실 1봉의 진미는 바위 너머에 있다. 중앙의 비좁은 바위틈을 헤집고 빠져나가 절벽 끝에 서면 광활한 바다와 어우러진 목가적인 농촌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서북쪽으로 이원반도와 대산반도가 둘러싼 가로림만이 발아래 넘실대고 만 안에 들어선 수많은 섬들이 내려다보인다.
2봉 가는 길은 본격적인 암릉길이다. 철계단이 가파른 줄 모르고 치솟아 있다. 도중에 거북바위와 한 몸을 이룬 거대한 우럭바위가 반겨주고, 정상에 서면 코를 길게 내뺀 코끼리바위가 달려든다. 암릉길 내내 이상화씨는 문소이씨가 행여 미끄러질까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 부부애를 과시한다.
3봉을 향하는 주릉에도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귀여운 사자를 닮은 것 같은 해태상이 숲속에서 튀어나오기도 하고, 힘센 용사의 어깨를 닮았다는 어깨봉이 위세를 부리기도 한다. 3봉 정상부 또한 1봉 노적봉처럼 여러 개의 바위가 겹쳐지고 쌓여 솟구쳐 있다.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통천문, 용굴, 철계단 등을 거쳐야 한다. 통천문 안에 들어서니 비에 홀딱 젖은 개 한 마리가 앉아서 눈만 끔뻑끔뻑하며 등산객들을 바라본다. 등산객들을 안내하는 팔봉산의 수호견인 모양인데 측은하기 짝이 없다. 통천문 바로 위쪽에는 팔봉의 수호신이 산다는 용굴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다. 가뭄 때면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준다는 신령스런 용이다. 경칩을 하루 지난 봄비 또한 신령스런 용의 축복일 터다.
수직벽에 설치된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자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구름이 온 산을 뒤덮어 3봉 정상이 하나의 섬처럼 솟구쳐 있다. 산정을 뒤덮은 비구름이 사방에서 몰아치며 비를 퍼붓는다. 설핏 보이던 풍광조차 금세 사라진다. 동서남북 360도 거침없는 조망이 펼쳐지는 곳인데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일단 어디 비 피할 곳을 찾아서 점심 먹고 가죠?"
"3봉을 내려서면 안부가 나오니 그곳에서 쉬는 게 좋겠네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하지만 안부에 자리를 잡고 빗속에서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출발한다. 사방에서 비가 내리치고 구름이 몰려갈 기미가 전혀 없다.
4봉을 넘어선 후 8봉까지는 일사천리다. 해발 300m 전후의 작은 봉우리들이 연이은 고분군처럼 봉긋봉긋 솟아 있다. 이전 봉우리만큼 수려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저마다의 나름 특색을 지녔다. 5봉(290m), 6봉(300m), 7봉(295m)을 지나 8봉(319m)에 올라선다. 여전히 구름이 뒤덮은 산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 금강산으로 뻗어 내린 능선 찾기가 만만치 않다. 스마트폰 지도에 의지해 하산하다 능선을 우회해서 산이고개에 내려선다. 다들 우중산행에 지친 모양인지 하산하고픈 심정이 간절해 보인다.
"저희들은 이곳에서 내려서면 안 될까요?"
"여사님 두 분은 그리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날머리인 금학3리 마을회관까지는 금강산을 거쳐 가도 별반 차이는 없을 거예요. 임도길이 헷갈리니 잘 찾아가셔야 됩니다."
금강산을 거쳐 꽃송아리에서 봄을 맞다
금강산 구경 가자는 유도성 멘트에 결국 다 같이 다시 동행을 한다. 금강산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여느 시골의 펑퍼짐한 야산과 다르지 않다. 다들 실망이 대단하다. 너른 임도를 따라 바삐 걷다 보니 금강산 정상에 선다.
"하나도 볼게 없는데요. 금강산 정상석밖에요."
시차를 두고 정상에 도착한 일행들이 모두 말을 맞춘 듯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내뱉는다. 정상석도 사실 무르팍에도 안 닿는 크기다. 그래도 금강산에서 유일무이하게 반듯한 돌이다. 원래는 비룡산飛龍山까지 갈 계획이었지만 말도 꺼내기 어렵게 됐다. 금강산 정상에서 바라본 비룡산은 승천하는 용의 모습은커녕 제대로 된 산의 형세도 갖추지 못한 야트막한 능선의 일부로 보일 뿐이다. 다만 비룡산의 죽사를 보지 못한 게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비룡산 중턱 절벽에 자리한 죽사竹寺는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641~660) 때에 승려 도감이 창건한 절이다. 옛날에 바위와 대나무가 쉬흔질(오십 길의 방언) 위로 먼저 올라가는 내기를 했는데, 대나무는 쭉쭉 뻗어서 올라가고 바위는 몸집을 불려가면서 위를 향했다. 그런데 쉬흔질에 살던 용이 바위가 자신의 안식처를 좁혀오자 화가 나서 바위에 뇌성벽력을 치고 승천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이 비룡이요, 대나무가 이겼다 하여 사찰 이름이 '죽사'가 됐다는 전설이다.
단숨에 꽃송아리마을 뒤편에 자리한 짚뿌리재에 당도한다. 옛날에 서낭당이 있어 서낭제라 불리던 곳이다. 거대한 팽나무 한 그루가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다. 오래도록 마을의 역사를 품었을 터다.
꽃송아리마을로 내려서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꽃송아리란 산자락 다락논에 꽃들이 많이 피고 청량한 솔숲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봄비는 어느새 그치고 햇살이 내리비친다. 길가에 샛노랗게 핀 생강나무가 봄날처럼 화사하게 다가온다. 마을 어귀 다락논에는 새파란 마늘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생기발랄하다. 만물이 생동하고 있다.
산행길잡이
충남 서산에 자리한 팔봉산八峰山은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관광명소다. 팔봉산은 금북정맥 금강산(316m)에서 서북쪽 건너편에 이웃한 봉우리다. 높이 362m, 주능선 길이 3k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지만 여덟 봉우리가 서해 가로림만에서 불과 1km 남짓 거리에 병풍을 이루며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산 곳곳에는 우럭바위, 거북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이한 바위가 많고 암릉이 아기자기해서 산행 내내 지루함 틈이 없다. 그중 암봉을 이룬 1~4봉의 조망이 탁월하다. 정상은 3봉(362m)이다.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방이 가파른 절벽이다. 3봉 정상에 서면 360도 파노라마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서해와 가로림만의 풍광은 일품이다. 팔봉산만 원점회귀 산행을 하려면 3봉을 지나 하산하는 게 편하다. 바위가 가파르지만 철계단 등 시설이 잘 정비돼 있다.
금강산은 산이고개를 거쳐 이어진다. 산길은 내리 낮고 걷기 좋은 길이다. 금강산은 이름과 달리 볼 것 없는 시골의 평범한 야산이다. 비룡산도 마찬가지다. 팔봉산 하나로 성이 차지 않는 건각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걷기 좋은 산이다. 금강산이나 비룡산까지 산행할 때는 차 한 대를 꽃송아리마을(금학3리 마을회관)에 주차해 두는 게 편하다.
교통·맛집(지역번호 041)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남부터미널에서 서산행 버스가 다닌다. 서산공용버스터미널에서 팔봉산 양길리나 어송리 주차장까지는 705번, 720번 버스가 약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자가용 이용 시 서울-서해안고속도로-서산IC -팔봉산 양길리 주차장/어송리 주차장/꽃송아리마을(금학3리 마을회관)
팔봉산 양길주차장 주변에 산아래쉼터(들깨칼국수, 662-7765), 팔봉산가든(두부전골, 662-1718), 팔봉산코뚜레(소곱창전골, 662-7793), 팔봉산솔바람(아구탕, 665-3579) 등이 있다.
등산지도 - 특별부록 지도 참조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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