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180프랑…佛 국립도서관은 왜 <직지>를 몰라봤을까[이기환의 Hi-story](80)

2023. 4. 26.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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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유산계의 화제는 단연 <직지>입니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7월 16일까지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회에 <직지>를 50년 만에 공개하고 있는데요. 이번 특별전 기사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근본적인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말로만 <직지>, <직지> 했지, 과연 <직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의 가치는 첫 소장자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잘 알고 있었다. 1896~1899년 사이 를 수중에 넣은 플랑시는 의 표지에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연대는 1377년’이라고 기록해놓았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직지> 연구자인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의 논문과 단행본 등을 토대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손가락으로 직접 가리킨다는 직지(直指) <직지>의 풀네임은 <백운화상 초록 불조 직지심체요절>입니다. 고려말 선승인 백운화상(1298~1374)이 ‘부처(불·佛)와 조사(조·祖, 고승)의 깨달음(심체·心體)을 직접 가리켜 보인(직지·直指) 요점(요절·要節)을 뽑아 엮은 책(초록·抄錄)’이라는 뜻이죠. 그냥 줄여 <직지심체요절> 혹은 <직지>라 합니다.

그분이 75세였던 1372년 9월 석가모니 부처를 비롯한 과거 7불과 인도·중국 고승 138인의 어록을 뽑아 두 권(상·하권)으로 엮은 것이 <직지>입니다. 백운화상의 입적 3년 후인 1377년(우왕 3) 7월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청주 흥덕사에서 묘덕이라는 비구니의 시주를 받아 금속활자본으로 찍어냈습니다. 두 권 중 ‘하권’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는 겁니다.

수두룩한 흠결이 바로 금속활자본의 증거 모두 1만2304자로 찍은 <직지>에는 금속활자의 자취가 역력합니다. 우선 본문의 행과 열이 고르지 않고요. 활자의 크기와 모양, 인쇄 상태도 그렇습니다. 글자의 먹 색깔에도 차이가 나는데요. 획의 일부가 인쇄되지 않아 붓으로 덧칠한 흔적도 있습니다. 조판 때 활자가 밀렸거나, 수평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거나, 인쇄 때 먹이 고르게 묻지 않아 생긴 현상이죠.

같은 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일한 활자가 다른 장에서는 반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활자가 부족해 ‘소자(小字)’로 대체하는 경우도 119회나 됩니다. 활자를 더 주조하지 않고, 있는 것을 재활용했다는 증거죠.

거꾸로 인쇄됐거나 빠진 글자도 보입니다. 초창기 금속활자 제작의 기술 부족으로 생긴 너덜이(쇠찌꺼기) 등도 보입니다. 또 행을 넘기지 않으려고 작은 활자(소자)로 대체했거나, 마지막에 두 자를 나열해 조판한 경우도 보입니다. 이런 것은 목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초창기 금속활자본의 특성입니다.

는 1377년(고려 우왕 3) 7월 백운화상의 문인인 석찬과 달잠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목 교외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반출 경위가 비교적 분명한 <직지> <직지>는 구한말 프랑스 외교관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갈림덕·葛林德·1853~1922)가 구입해 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플랑시는 파리대에서 법학학사를 받고 파리 동양어학교에서 다시 중국어를 전공한 뒤(1877)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1888년 6월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가 돼 3년간(1891년 6월까지) 서울에 주재합니다. 이후 일본에서 5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1896년 4월부터 주한공사 겸 총영사로서 두 번째로 서울로 부임합니다.

플랑시는 공사관 통역이었던 모리스 쿠랑(고항·古恒·1865~1935)에게 “한국에서 간행되는 모든 서적의 목록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합니다. 단순 권유에 그치지 않고요. 쿠랑의 <한국서지> 목록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습니다.

플랑시의 도움을 받은 쿠랑은 1894년에서 1896년 사이 <한국서지>(1·2·3권)를 출간합니다.

목록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플랑시는 1차 부임 때(1888~1891) 수집한 고서를 모교(동양어학교)에 기증했습니다.

<직지>는 그러나 <한국서지> 1·2·3판에도, 동양어학교 기증품에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3738번의 비밀 쿠랑은 이후 추가로 조사한 목록 580건(3241~3821번)을 다시 책자로 만들었는데요.

그것이 1899년 출간한 <한국서지> ‘부록판(supplement)’입니다. 그중 ‘3738번’ 항목에 <직지>가 등장합니다.

“3738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1책… 1377년 청주목 바깥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활자로 인쇄됨. 내용이 정확하다면 활자는… 태종의 명(1403년 주자소 설치 및 계미자 개발)보다 26년가량 앞서 사용….”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한국서지> ‘부록판’에 실린 <직지>가 12년이 지난 1911년 3월 27일 열린 드루와 경매장에 출품된 ‘플랑시 컬렉션’ 883종 가운데 끼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플랑시가 첫 번째 한국 근무(1888~ 1891) 때 구입한 도서는 동양어학교에 기증했다고 했죠. 하지만 두 번째 근무 때(1896~1899) 수중에 넣은 <직지> 등은 기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2년 뒤 ‘플랑시 컬렉션’의 이름으로 경매에 출품된 겁니다.

모리스 쿠랑은 부록판(1901) 서문에서 “1차 체류 때(1888~1891) 수집한 한국 관련 서적을 동양어학교에 기증한 플랑시는 두 번째 조선 체류 때(1896~1899)도 서적을 모았다”고 썼다. 쿠랑은 그중 한국의 인쇄사와 관련, 흥미로운 책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선보였다“고 전했다. 그 책은 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 디지털 자료실



무엇을 뜻할까요. 플랑시가 두 번째로 서울에서 근무한 1896년 4월부터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잠시 프랑스로 떠났던 1899년까지가 주목됩니다. 그 3년 사이에 <직지>를 입수하면서 쿠랑의 <한국서지> ‘부록판’에도 포함시킨 겁니다. 쿠랑의 <한국서지> ‘부록판’의 서문에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플랑시가 첫 번째 조선 체류(1888~ 1891) 때 모았던 장서의 완결을 위해 두 번째 체류(1896~1899) 때 일련의 새로운 도서를 모았다. 첫 번째 장서는 파리 동양어학교에 기증됐고, 이번의 수집을 통해 분량이 더욱 풍부해졌다.”

처음부터 직지 가치를 알아본 플랑시 플랑시는 어떻게 <직지>를 수중에 넣게 됐을까요.

당시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1842~1893)의 회고담이 눈길을 끕니다.

“콜랭 드 플랑시는 ‘프랑스 여행자가 매일 아침 프랑스 공사관에서 조선 토산품의 견본을 구입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상인들이 떼를 지어 오면… 조선인 비서들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사들였다.”

플랑시 역시도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직지>를 구입했을 겁니다.

플랑시는 처음부터 <직지>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직지>의 표지와 속지에 남긴 글을 보십시오.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한국 책. 연대는 1377년’(표지)

‘불교 교리 내용.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인쇄본’(간지)

플랑시는 한자 이름(갈림덕·葛林德)의 ‘갈(葛)’ 자에 ‘플랑시의 장서표’ 명문을 인쇄해 두었습니다. ‘갈(葛)’ 자 위에도 ‘한국 활자본으로 가장 오래된 책, 1377년’이라 적혀 있습니다.

<직지>는 1900년 4월 15~11월 15일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는데요.

쿠랑이 만국박람회 한국관을 소개한 팸플릿(‘1900년·서울의 추억’)을 볼까요.

“…대중은 한국에 인쇄소가 있고 문학이 번창·존재했다는 것을 모른다…. 한국인들이 10세기 이전에 목판으로 인쇄했고,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태종 3·1403)와 이보다 더 일찍 활자(Types mobiles)를 발명….”

플랑시는 1900년 파리박람회에 한국관을 운영하는 데 도움을 준 공로로 고종황제로부터 최고등급인 태극장(1등) 훈장을 받았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황정하 사무총장 제공



단돈 180프랑에 팔린 <직지> 플랑시는 대한제국의 만국박람회(1900) 참가를 도운 공로로 고종에게서 태극훈장(1등)까지 받았는데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프랑스 공관이 철수하게 되면서 조선 땅을 떠납니다. 급기야 1907년에는 30년 외교관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는데요. 그후 4년 만인 1911년 3월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수집한 유물 883종을 경매에 내놓습니다.

이때의 경매물건 중 <직지>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플랑시가 왜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직지>를 경매에 내놓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은퇴 이후 노후자금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당시의 경매기록부는 <직지>를 경매물건 중 711번으로 표시했습니다. 플랑시는 경매 카탈로그 서문에서 “구텐베르크 발명 훨씬 전에 한국이 금속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고 <직지>를 콕 찍어 홍보했습니다.

이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플랑시 컬렉션’ 중 108건을 구입해 가는데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국립도서관이 <직지>를 외면한 겁니다. <직지> 등 일부 유물을 구입한 이는 당대의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1854~1943)였습니다. 이때 <직지>의 경매낙찰가격이 ‘단돈 180프랑’(2006년 기준 약 67만원)이었답니다.

놀라운 일이었죠. 프랑스 국립도서관 담당자의 눈이 삐었을까요. 순간적으로 귀신에 씌었을까요. 파리 국제박람회에도 출품됐고, 경매 카탈로그에서도 ‘구텐베르크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으로 소개된 <직지>를 빼놓고 구입했다니 참….

뒤늦게 판단 착오를 인정한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이 세 차례나 베베르를 찾아가 <직지>의 기증을 간청했습니다.

물론 베베르는 단칼에 거절했고요. 베베르는 훗날 손자(프랑수와 모탱)에게 “<직지>와 <육조법보단경>(불경)만큼은 국립도서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답니다.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직지>와 <육조법보단경>(불경)은 1950년 국립도서관에 기증됐습니다. 국립도서관 측은 이 두 유물에 ‘플랑시 컬렉션’에 붙였던 고유번호를 추가했습니다. 즉 ‘109번=<직지심체요절>’, ‘110번=<육조법보단경>’의 번호와 이름을 부여한 겁니다.

결국 는 과 함께 베베르 사후(1950)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됐다. 도서관 측은 에 ‘한국 109번’, 에 ‘한국 110번’의 번호와 이름을 붙여주었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 디지털 자료실



프랑스 현지에서 각광받은 <직지> 그런 <직지>가 재조명된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유네스코가 정한 제1회 세계 책의 해를 기념해 5월 17일에서 10월 31일 사이 귀중본을 엄선한 특별전을 마련했는데요. 이때 <직지>는 <경국대전> 및 <여지도>와 함께 출품됩니다.

에티엔느 덴느리 도서관장은 도록 서문에서 “동양에서는… 인쇄술이 한국에 전달돼 3세기 동안 발전을 거듭했고, 구텐베르크보다 수십 년 앞서 금속활자를 다룰 줄 아는 놀라운 기술에 도달했다”고 소개했습니다.

프랑스 국영 제1TV는 ‘서양 교과서를 바꿔야 할 금속활자의 역사’로 표현합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가가 아니다. 여기 그 증거가 있다. 한국의 흥덕사라는 절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다. 구텐베르크 발명보다 78년 앞선다. 우리는 금속활자의 영광을 이제 동양의 한 나라(한국)에 돌려줘야 할 것이다.”

당시의 전시 도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책은 15세기 말이다. 따라서 한국보다 늦다. 한국에서는 13세기에 금속활자가 최초로 사용됐다”고 소개했습니다. 특별전 도록은 ‘직지심경, Coreen(한국도서) 109, 수도승 백운(14세기)이 수집 불교 승려 교육 교본.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됨’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이미 한국도서로 분류됐음을 알 수 있죠.

<직지>는 1년 뒤인 1973년 ‘동양의 보물’을 주제로 한 특별전에 다시 출품됩니다.

전시 도록은 손보기 교수(연세대)의 단행본(1971)을 인용해 “13세기부터 새로운 기술이 고려에 도입된다…. 인쇄술은 한국이 중국을 능가했으며 유럽(독일)을 앞서갔다”고 소개했습니다.

박병선 박사의 역할 <직지>와 관련해 단골로 등장하는 이가 바로 고 박병선 박사(1928~2012)입니다.

요컨대 프랑스 국립도서관 서고에 묻혀 있던 <직지>를 발굴해 그 가치를 알린 이가 박병선 박사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살펴보았듯이 <직지>의 가치는 이미 프랑스 외교관인 플랑시가 소장했을 때부터 알려졌습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됐을 때, 1911년 경매에 출품될 때,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될 때, 1972년 ‘책의 해’ 특별전 출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직지>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72년 5월이었습니다. 특별전 개최 소식과 <직지>의 출품 사실을 처음 알린 언론(조선일보)의 특종보도(5월 28일자)가 있었습니다. 그 기사에는 ‘박병선’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박병선 박사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972년 전시회가 끝난 뒤 도서관 동료에게 부탁해 인화한 <직지> 흑백사진을 국내로 가져오는데요. 국내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들고 온 공로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직지>의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죠. 그런 만큼 그러한 <직지>를 둘러싼 기본적인 팩트체크 또한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직지>와 같은 문화유산을 말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가 섞이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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