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마이크론 사태, 반사이익은 없었다

정용환 기자 2023. 4. 26.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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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커플링 시대 축소판, 마이크론 사태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 30년,
美·中 디커플링은 '와당탕'
삼성전자·SK하이닉스 중국 공장
美·中 '반도체 전쟁'에 볼모 신세
평화로운 국제분업 시대 저물고,
사활적 이익 걸린 디커플링 부상
[사진= mlive닷컴 캡처]
“국제정치학에서 20세기를 통틀어, 그리고 현재까지 가장 큰 규정력을 발휘하는 사건은 무엇일까요. ”

2007년 어느 봄날 저녁, 대학원 강의실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학생들은 저마다 영향력이 컸던 사건들을 떠올립니다.
“1ㆍ2차 세계대전? ”
“대공황?”
“미ㆍ소 냉전?”
“쿠바사태?”
“중국의 개혁ㆍ개방?”
사건의 규모나 파급력이 모두 상당한 역대급 사건들입니다. 답은 무엇이었을까요. 교수님이 입을 뗍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인한 냉전의 해체입니다.”

쥬라기,백악기처럼 대형 단층대가 등장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냉전의 해체는 국제정치학에서 축의 전환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냉전의 해체는 그동안 공산 블록으로 막혀 있는 러시아, 중국, 동구권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출현을 낳았습니다. 세계의 시장은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의 물류망이 못 가는 데 없이 뻗어 나갔습니다. 거대 시장이 등장하고 이를 연결하는 유통ㆍ운송이 통합되자 상품 생산에서 인류가 그동안 겪어 보지 못했던 혁신이 등장했습니다. 국가간 분업입니다.

4월 17일 중국의 항모 산동함에서 헬기가 이륙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최적의 생산성을 뽑아낼 수 있는 곳에서 분업 시스템이 구축됐습니다. 생산 단계별로 비교 우위에 있는 여러 국가들이 뛰어들어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모든 단계에서 부가가치가 발생했습니다. 이를테면 애플의 아이폰처럼 제품 컨셉과 기획, 디자인은 미국에서, 디스플레이와 시스템ㆍ메모리 반도체는 한국과 대만에서, 또 다른 핵심 부품은 일본에서 조달해 중국 본토에서 최종 조립하는 글로벌가치사슬(GVC)이 탄생한 겁니다.

한마디로 어떤 지역에서 아웃소싱이 유리한 건 최대한 아웃소싱해 제품을 생산한 뒤 전 세계에 판매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냉전 해체로 등장했습니다.

GVC는 중국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의 저비용 제조력이 GVC를 돌리는 원동력입니다. 이제 냉전 해체 후 30년간 풍미했던 GVC가 저물고 디커플링의 태양이 뜨고 있습니다. 30년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GVC도 북미ㆍ유럽 등으로 쪼개질 운명입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의 연구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그런데 말입니다. 30년간 최고의 효율에 초점을 맞춰 구축된 GVC를 분해해 재조립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립니다. 또 가격 경쟁력에 대한 미련 때문에 디커플링에 저항하는 기류도 감지됩니다. GVC까지 30년인데, 디커플링도 시간이 필요한 일일 텐 데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발을 들일 때는 사뿐히 들이밀고, 발을 뺄 때는 좌우 살필 것 없이 거칠게 뽑아 빼는 모양새입니다. 가속 페달을 사정 없이 밟습니다.

문제는 디커플링이 급가속을 밟고 있는 요즘 같은 때입니다. 요즘 핫이슈인 마이크론 사태의 불똥이 마침내 우리 기업으로 튀었습니다. 지난주 유탄 가능성을 우려(『마이크론 사태, 韓반도체 진영 심사 복잡한 이유』, 4월13일, [중국은, 왜])했는데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진= 바이두백과 캡처]
중국 정부가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중국 내 D램 판매를 금지할 경우,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그 물량을 대체하지 말아달라는 미국 정부 요청이 있었다고 엊그제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는데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지난해 12월 중국 반도체 기업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중국의 첨단 3D낸드플래시 제조 역량을 집중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중국은 보복 조치로 마이크론이 중국에 판매하는 반도체 칩들이 국가 안보를 침해하는지 여부를 조사 중입니다.

[사진=ING 캡처]
요컨대 미국이 반도체 장비 관련 기술 견제를 강화하자 중국이 미국 기업을 상대로 반격했고 다시 미국이 동맹국 기업들을 압박해 대중 봉쇄를 가하는 형국입니다.

한마디로 반사이익은커녕 미ㆍ중 양쪽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조마조마한 처지에 서게 됐습니다.

마침 대통령이 방미 중이니 정상간 대화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외교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든가, 마이크론 대체 물량을 안 팔기로 한다면 보상 방안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단기 해법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낸드플래시의 경우 여러 제조업체가 있지만 D램은 3개 업체 뿐입니다. 마이크론 물량을 빼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밖에 대체 구매처가 없습니다. 삼성과 하이닉스도 중국으로 반입되는 반도체 장비 허들이 어떻게 높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 미국 정부가 한국 반도체 기업의 중국 사업을 본격적으로 통제할 것이란 관측에서 더 나아가 이젠 본격적으로 현실화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우리 반도체 기업이 중국에 투자한 자금이 70조원이 넘고 중국 시장 매출 비중이 절대적이라 해도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공식 확인이 안 나왔지만 미국의 요구가 사실이라면 반시장적 발상은 맞습니다. 기술 패권 다툼에서 자국 기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동맹국 기업에 진퇴양난의 선택지를 강요하는 것도 못 마땅합니다.


[사진= 바이두백과 캡처]
비정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최첨단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네덜란드 ASML은 미국의 중국 반도체 산업 제재에 동참키로 했습니다. 대대적인 정부 투자로 중국에 큰 장이 섰는데, 극자외선(EUV) 노광기 등 ASML의 최첨단 장비는 대중국 수출 품목에서 빠졌습니다. 결정의 배후엔 미국의 압박과 설득과 회유가 있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습니다.

ASML의 EUV 제품에 탑재된 핵심 부품과 기술 중 20% 안팎이 미국에서 제조됐거나 미국 기업·연구소의 IP(지적재산권)를 쓰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압박·설득·회유가 먹힐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단기적 시각에선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언론을 통해 공식화된 이상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입 다물고 좌우로 눈치를 보게 되는 신세입니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잘 알잖느냐, 안 팔면 중국과 불편해지지만 팔게 되면 중국 사업 접어야 할지도 모를 일 아니냐'는 거죠.

이 사태, 어떻게 흘러갈까요.

마이크론 제재는 표면상 대체 구매처가 있어 반격 카드로 쓸 만했지만 미국이 배수진을 치고 반시장급 조치까지 서슴지 않고 달려드는 이상 D램이 다급한 중국으로선 달리 묘안이 없을 겁니다.

조사를 벌인 결과 몇 가지 시정 필요가 있다는 선에서 슬그머니 봉합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힘의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에 선 미국의 뜻대로 마이크론 사태는 봉합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디커플링입니다.

이렇게 패권 대결 국면에서 일어나는 디커플링은 사안의 성격이 반시장적일지라도 승부에 도움이 되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마이크론 사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디커플링의 본질이 산업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디커플링 과정에서 중국 기업에 대한 기술 견제가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과 사생결단의 기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우리 기업 입장에선 한숨 돌릴 수 있는 틈새가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그 지점까지 가기까진 이렇게 조마조마한 양자선택의 순간들이 순차적으로 대기하고 있을 텐데요. 이번 마이크론 사태는 우리 산업 전반에 먼 미래까지 시야에 끌어당겨 차분하게 단계별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는 과제를 던져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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