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행보로 바이든 속 긁는 마크롱·빈살만·룰라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인
프랑스·사우디·브라질
경제 고리로 중국과 밀착
미국 주도 질서에서 탈피
“지역 맹주 꿈꿔” 분석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반러시아’ 체제를 공고히 하려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전략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유엔총회 투표 성향, 러시아 제재 이행 여부,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 정도 등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127개국이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로 나타났다.
미국으로선 전통적인 우방들의 변심이 뼈아프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최근 ‘독자 노선’을 강조하며 바이든 대통령의 속을 긁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과의 접점을 넓혀가고 있는데, 외신과 전문가들은 이 같은 친중 행보를 실용 외교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에너지 대란 등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 경제의 큰손인 중국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들이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로 ‘대륙의 지도자’ 자리를 꿈꾼다는 설명이다. 세 사람의 최근 발언을 보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탈피해 각 지역의 맹주가 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세 나라 모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거나 경제·사회 시스템 변혁기에 놓여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미국과 각을 세워 내부 갈등을 정리하겠다는 의중이 읽힌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9일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 비행기에서 진행된 언론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를 언급하며 “최악의 상황은 유럽이 추종자가 돼 미국의 장단과 중국의 과잉 대응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두 초강대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전략적 자율성’을 구축할 시간이나 재원을 마련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의 비판이 쏟아졌지만, 지난 12일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해서도 “동맹이 곧 속국이 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며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CNN은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자신을 유럽연합(EU) 지도자로 내세우려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앞서 이코노미스트는 호주에 핵잠수함 기술을 이전키로 한 거액의 계약을 미국에 뺏긴 것도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스의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한 요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불안한 국내 입지가 깜짝 발언을 부추겼다는 시각도 있다. 그가 이끄는 중도연합은 지난해 6월 총선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연금개혁안 강행 처리 후폭풍도 거세다.
빈살만 왕세자의 광폭 행보는 더욱더 놀랍다. 지난달 중국의 중재로 ‘앙숙’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에 시동을 걸었고, 2011년 내전으로 아랍연맹(AL)에서 퇴출당한 시리아의 복귀에 앞장서고 있다. 예멘 분쟁 해결에도 적극 개입하고 있다. 반면 오랜 우방인 미국엔 냉랭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에너지 가격 대응을 위한 바이든 대통령의 증산 요청을 계속 거부하고 오히려 감산을 결정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매우 느린 외교로 악명 높은 사우디의 놀라운 진전”이라며 “미국의 미래가 불확실한 시기에 사우디의 맹렬한 외교 노력이 중동 지역의 역학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외신들은 이란이 수개월 동안 계속된 반정부 시위와 서방 제재로 흔들린 틈을 타 빈살만 왕세자가 중동·아랍 리더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매김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석유 등 에너지 일변도의 산업 구조 재편에 나서며 내부 개혁을 추진 중인 빈살만 왕세자가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란·시리아 등과 손을 잡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WP는 “국내 개혁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선 해외에서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룰라 대통령도 미국 때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지난 14일 중국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나 미국 1강 체제 거부와 다자주의 강화를 천명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도 “미국 등 서구 열강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해 분쟁을 연장하고 있다”는 등 날 선 발언을 쏟아냈다. WP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시절 약해진 브라질의 남미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전략의 일부”라고 진단했다. 이코노미스트도 “룰라 대통령이 조만간 아프리카를 방문할 예정”이라며 “그곳에서도 브라질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룰라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하며 남미판 EU로 불리는 우나수르 재건을 외교정책 1순위로 꼽았다. 2008년 남미 12개국이 참여해 출범한 우나수르는 현재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상태다. 룰라 대통령은 지난 16일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 파라과이 대통령을 만나 “우나수르를 다시 일으켜 남미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계획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과 함께하는 무역공동체 메르코수르(남미경제공동체)의 단합도 언급했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남미의 더 큰 협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남미 화폐 통합을 추진하겠다는 뜻도 내비친 상태다.
손우성 기자 applepi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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