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전세사기, 세입자는 잘못 없다
표준계약서·보증보험, 사기에 무용지물
공포로 수요 준 빌라 '깡통'전락 위기
서민에겐 부양책 보다 주거안정 절실
당정, 안전망 작동여부 세심히 살펴야
표준임대차계약서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집주인이 임차인에게 임차보증금 보증보험이 곧 승인 날 것이라 했고 공인중개사까지 옆에서 ‘걱정말라’고 거들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모든 게 완벽했다. 아무 걱정 없을 것만 같아 들어갔던 집에 갑자기 세무서 압류라는 ‘빨간 딱지’가 날아왔다. 전세사기였다. 지난해 갭 투자를 통해 수도권에서 1100여 채의 빌라를 사들인 후 임대사업을 하다 사망해 보증금 미반환 사고를 낸 ‘빌라왕’ 사건 피해자의 이야기다.
전세사기는 전국 빌라·다세대 세입자를 공포로 몰아갔다. 처음에는 서울 화곡동, 인천 미추홀구 등을 중심으로 일더니 이제는 경기도 화성, 동탄, 대전을 지나 부산까지 번졌다. 내일은 또 어디가 당할지 모른다. 비극도 일어났다. 벌써 3명이 생명의 불꽃을 스스로 껐다.
누군가 말한다. ‘좀 꼼꼼히 살피지’ ‘얼마나 모자랐으면 사기를 당할까’. 과연 그럴까. 피해자는 공인중개사를 통해 계약했고 국내 4대 은행 중 한 곳의 깐깐한 심사를 거쳐 전세자금을 대출 받았다. 임대사업자를 관리 감독하는 구청에서도 임대차 신고를 받아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지만 사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해자는 이들만이 아니다. 전 재산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빌라·다세대주택에 대한 기피로 확산하면서 전세 수요 급감과 집값 하락을 초래했다. 임대사업자가 아닌 집 한 채가 가진 것의 전부인 개인 소유자에게는 치명적이다. 집값이 떨어지면 전세가율(전세가를 매매가로 나눈 비율)은 올라가고 깡통전세는 늘어난다. 정상적인 거래에서도 언제든 똑같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민 주거의 파멸적 위기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사실 깡통전세·전세사기의 문제는 저금리에서 고금리로 방향이 바뀐 후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한 민간 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전국 주택 전세가율은 지난해 상반기 이미 87%를 넘어섰다. 지금은 100%에 육박하거나 넘어선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임차인들이 언제 다시 통곡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빌라·다세대는 전형적인 서민 주택이다. 그 수만 해도 2021년 기준 277만 가구나 된다. 이 중 사기가 집중된 곳들도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의 외곽 지역이다. 최소 10억 원 이상 있어야 살 수 있는 서울 도심 아파트는 꿈도 못 꾸는 20~30대 청년, 신혼부부, 저소득층이 이곳에서 비빌 언덕을 찾았다. 전세사기는 서민의 주거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순히 제도가 미비했다고 탓해서도 안 된다. 지난 정부는 전세가격을 안정시키겠다며 임대차 기간을 연장하는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 신고제 등 소위 ‘임대차 3법’과 전세 대출 확대 조치를 취했지만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정부가 시장을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다.
이번 정부라고 다를까. 빌라왕 사태가 터지기 5개월 전인 지난해 7월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도 전세사기 이슈가 다뤄졌다. 내놓은 결론은 ‘전국과 수도권은 전반적으로 양호, 확산 가능성은 제한적’이었다. 서민들의 삶을 모르니 시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도 없다.
그 사이 아파트 중심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대출 규제는 완화됐고 생애최초주택 취득세는 아예 없어졌다. 서울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오른다는 얘기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주거 형태에 따른 양극화가 이전보다 더욱 심해질 것 같다.
당정이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내놓았다. 피해자에 우선매수권 부여, 장기 저리 융자,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의 주택 매입 후 공공임대 제공 등이 골자다. 실효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주거 안전망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아파트 아닌 다른 주택에서는 어떤 삶이 이뤄지고 있는지 내부 점검이 이뤄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아파트 아닌 다른 주거 형태에 사는 사람이 아직 많다.
송영규 선임기자 skong@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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