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갈라치기로 끝난 양곡법 개정안 논란
쌀은 농민의 주된 소득원으로 농가 경제 안정을 떠받치는 작물이다. 쌀값 투쟁이 농민 모두의 투쟁이었던 이유다. 쌀값 안정화를 위해 농민단체들은 그간 대개 단일한 목소리를 내왔다. 그런 점에서 농민단체들이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서를 낸 최근의 행보는 이례적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런 흐름을 두고 ‘농민단체들도 반대하는 양곡법 개정안’이라며 법안의 무용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단체 내에서 불거진 찬반 갈등과 이견에는 침묵했다. 양곡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농민과 반대하는 농민은 누구일까? 이들의 갈등은 왜 정치권의 갈등과 닮아 있을까?
“특정 일부 지역에서 상당한 압박과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제가 많이 듣고 있습니다.” 올해 1월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농식품·해양수산 정책 보고회에 참석한 이학구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회장이 한 말이다. 양곡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한 이후 농민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 기자회견 이후 한농연은 양곡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농민단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농림부) 장관 등이 참석한 이날 보고회에서 이 회장은 “원칙과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에 개정안을 반대한다. 양곡법 개정안 통과는 후대에 큰 누가 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이학구 회장은 자신이 속한 한농연의 시군 대표단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고 있었다. 발단은 지난해 12월26일 열린 양곡법 개정 반대 기자회견이다. 이날 한농연과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한종협, 상임대표 이학구),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 한국4-H본부 등은 양곡법 개정안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농연은 쌀값 안정화를 위해 상경 집회, 논 갈아엎기, 삭발투쟁 등을 이어온 국내 양대 농민단체 중 하나다. 그런 단체가 쌀 매입 의무화에 따른 재정 투입을 우려하며 개정안 통과를 반대한 것이다.
반대 단체들의 주된 논리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농경연)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양곡관리법 개정안 효과 분석 결과’ 보고서였다. 양곡법 개정안을 시행하면 쌀 과잉공급이 심해져서 남는 쌀을 시장 격리하는 데 2030년까지 연평균 1조원 규모의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윤석열 대통령이 양곡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근거이기도 하다. 이후 농경연 보고서 결과는 쌀 생산량 예측치를 과하게 추산하는 등 일부 내용을 왜곡·생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복수의 농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농경연 보고서 발표 이후 농림부 차관 등 정부 인사들이 지역 농민단체와 기관 직원 등을 모아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 인사들은 농경연 보고서를 근거로 양곡법 개정안 반대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농림부 관계자들이 지역 언론을 찾아 관련 내용을 보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쌀농사가 무너지면 벌어지는 일들
최현석 전국농민회 부산경남연맹 사무처장은 농림부가 ‘네 쪽짜리 보고서’를 들고 다니면서 전국 순회를 한 이후 일부 농민단체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단체나 학계 사람들이 농경연 보고서를 근거로 대면서 정부·여당과 같은 목소리로 언론에 기고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시설 하우스 농사를 짓지만 쌀이 무너지면 모든 농업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쌀값이 계속 떨어져서 생산비도 못 건지면 결국 쌀 농민이 다른 작물로 전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른 작물도 쌀처럼 과잉생산되면서 값이 폭락할 수 있다. 농촌에는 따로 또 같이 연결된 저마다의 생태계가 있는데, 지역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의 입장은 어디 가고 일부 단체 집행부가 합의되지도 않은 입장을 낸 것이다.”
지난해 12월 기자회견은 또 다른 의미로도 눈길을 끌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는 한농연과 함께 기자회견을 연 단체들에 문제를 제기했다. 정부가 ‘반대 농민단체’라고 말하는 곳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는 농촌진흥청에서 운영하는, 농촌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농촌 여성단체일 뿐 농업 생산자 단체가 아니다. 공공기관 사업의 우선대상이 되는 등 혜택이 있어 관변단체의 성격이 짙어졌다. 한국4-H본부 역시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운영되는 전국 청년농업인 단체로 지역 간 단일한 입장을 사전에 조율했다고 보기 어렵다. 농촌에 있는 단체라고 해서 모두 농민단체라고 퉁칠 수 있나? 이런 단체들의 수를 세서 ‘많은 농민들이 개정안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건 억지스럽다.”
한농연에서도 합의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입장을 공식화했다는 문제 제기가 곧장 터져 나왔다. 노창득 한농연 전북도 연합회장은 해당 기자회견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이학구 회장이 농림부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성명서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오죽하면 기자회견을 접하고 시군 대표 40여 명이 다 같이 한농연을 항의 방문했겠나. 왜 개정안에 반대를 한 거냐고 따져도 이 회장은 ‘일일이 의견을 들을 사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노창득 회장은 〈시사IN〉에 양곡법 개정안이 농민 갈라치기에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정쟁화되기 전에 양곡법에 대해서 누가 신경이나 썼나? 야당이 냈던 개정안 원안에서 후퇴했음에도 양곡법 개정안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말하는 이유는 쌀값 안정을 위해서 다른 대안이 더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지난해 쌀값 폭락을 정부가 잘 방어했더라면 매입 의무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거다. 지난 정부에서 했던 ‘논 타 작물 재배 지원사업’을 3년 하고 말 게 아니라 꾸준히만 했어도 쌀 생산량 조절의 대안이 됐을 것이다.” 그는 뒤이어 정부의 소통 의지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부·여당은 양곡법이 야당의 1호 민생법안이 되자 일찌감치 반대한다는 입장부터 냈다. 농민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았다”라고 말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 역시 이번 양곡법 사태에서 쌀이 그저 정치적 도구로만 사용됐다고 말한다. “농촌은 인구구조로 봐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일련의 사태는 정부가 정치적 이해관계 안에서 ‘쓸모없는’ 그룹을 어떤 수사로 고립시키는지를 보여줬다. 정부가 통합의 정치는커녕 가난한 집안에 싸움을 붙인 셈이다.”
양곡법 개정안 거부도 모자라 최근 정부는 물가상승을 미리 잡겠다며 닭고기·무·대파에 대한 무관세 수입을 결정했다. 농민을 이처럼 무시했던 정부가 이전에 또 있었던가. 농심(農心)이 표심(票心)이라던 말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