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가득한 전세보증금 투쟁기 [프리스타일]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너 독하다. 내가 네 집주인이었으면 어으 상상도 하기 싫다." 술잔을 비운 지인이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 전세를 재계약했다.
특약에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이 불발될 경우 이 계약은 자동 무효가 된다'는 조항까지 넣었다.
"임대인이 2017년에 매입한 가격보다 전세금이 더 비싸네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당시 공인중개사는 이렇게 일갈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너 독하다. 내가 네 집주인이었으면… 어으 상상도 하기 싫다.” 술잔을 비운 지인이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 전세를 재계약했다. 기존 계약에서 전세금 일부를 낮춰 돌려받고, 역월세까지 받아냈다. 집주인에게 받아낸 역월세 이율은 6%, 2년 치 선이자가 통장에 입금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도장을 찍었다. 특약에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이 불발될 경우 이 계약은 자동 무효가 된다’는 조항까지 넣었다. 현재,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은 가입 심사 중이다. 4개월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겨우 도출한 합의점. 혹시 모를 소송 대비해 변호사와 미리 이야기도 마쳐두었다.
서울 강북권 빌라에 2021년 이사했다. 온 세상 전세가 미친 듯이 뛰어오르던 때다. “임대인이 2017년에 매입한 가격보다 전세금이 더 비싸네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당시 공인중개사는 이렇게 일갈했다. “그건 집주인이 투자를 잘하신 거죠.” 공인중개사는 2년 후 이렇게 말을 바꾼다. “임차인께서도 이사비를 굳히니까, 재계약하시는 게 어떨까요. 저도 힘드네요….”
2018년부터 전세 사기 관련 기사를 썼다. 올해 초에도 후속 보도를 했다. 기사를 보고 주변 지인들이 연락해왔다. “나도 큰일났다.” 대개 2021년 폭등기에 빌라 전세를 구한 이들이다. 일부는 ‘전세 사기범 블랙리스트’에 오른 악명 높은 임대인에게 당했다. 그 밖에 대부분은 단순 역전세 또는 깡통전세로 고통받고 있다. 상대방(집주인)은 영끌과 갭투자로 자산 증식을 꿈꾸던 또 다른 비슷한 또래인 경우가 많았다.
독하다는 칭찬은 사실 달갑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머릿속에는 그런 의문이 가득하다. 돈 좀 쥐고 계신 분들은 ‘전세 제도 자체가 미개한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 안 한 것은 결국 당신 책임’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했냐)’을 시대정신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은행권의 전세대출부터 없애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이 주장은 나도 일부 공감한다). 그런데 이 모든 비아냥의 근간에는 ‘결국 집 문제는 개인이 책임질 문제’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매매가 아닌 임대차마저도 네 책임이라는 정서. 그래서 투쟁에서 판정승한 사람에게는 ‘독하다’는 칭찬이, 어버버하다 권리를 놓치는 사람에게는 힐난이 뒤따른다. 독해서 살아남긴 했는데, 별로 개운치 않다. 이 투쟁은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