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 봉건시대를 종언하고 거친 근대로 가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 유튜브 https://youtu.be/WoYjzka26nQ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풍경1: 1904년까지 집행된 참수형
1898년 7월 8일 2대 동학교주 최시형이 처형됐다. 수감 생활을 했던 곳은 서울 서소문감옥서였고 처형된 곳은 종로3가에 있던 고등법원 교형장이었다. 처형 방식은 교수형이었다.(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서소문 옥중 생활과 처형 과정’, 동학학보 38호, 동학학회, 2016)
6개월 뒤인 1899년 1월 9일 입헌군주정을 주장한 만민공동회 사건에 연루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돼 서소문감옥서에 수감됐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 퇴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돌린 혐의로 체포된 이승만도 끼여 있었다. 며칠 뒤 이승만은 공범들과 함께 탈옥했다가 체포돼 재수감됐다. 종로에 신설된 한성감옥서로 이감된 이승만은 7월 10일 탈옥 및 상해죄로 태형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평리원 재판장은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였다. 이승만에 따르면 “정적(政敵)인 홍종우가 7개월 동안 쓰고 있던 형틀을 제거해 주고 생명을 살리려고 온갖 힘을 써줬다. 야릇한 인생의 역전이었다.”(이정식,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부록, ‘청년 이승만 자서전’, 권기붕 역, 동아일보사, 2002, p263)
그가 한성감옥에 수감돼 있던 1904년 3월 15일 오후 10시 대한제국 마지막에서 두번째 참형(斬刑)이 집행됐다. 이날 참수된 죄인은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된 유동근이라는 인물이었다.(1904년 3월 15일 ‘고종실록’, ‘사법품보(司法稟報)’ 乙 43권) 마지막 참형은 1905년 5월 29일 역시 국사범 김형집에게 집행됐다.(1905년 5월 29일 ‘고종실록’. ‘황성신문’은 고종 윤허 전인 4월 25일 집행으로 보도했다) 참형은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형(身首異處·신수이처)’이다.(‘대명률강해’ 오형지도) 그 잔혹함 때문에 1895년 1월 갑오개혁 정부는 참형을 폐지했다. 하지만 1898년 11월 22일 고종은 자기 권력에 대한 도전이 잇따르자 갑오개혁을 무효화하고 역모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해 참형을 부활시켰다.
이러저러한 죄목으로 죄수 목을 베고 장대에 걸어 백성에게 보이는 조치를 ‘효수경중(梟首警衆)’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효수경중은 모두 142회 실시됐다. 이 가운데 53회가 1873년 고종 친정 이후 벌어졌다. 518년 조선왕조에서 벌어진 공개 참수형의 37%가 친정 33년 동안 집행된 것이다.
참수형 집행 5개월 뒤인 1904년 8월 7일, 그 무시무시한 야만의 시대 끝 무렵에 이승만이 특사로 풀려났다. 이승만은 그때까지 받았던 거친 수형 생활을 ‘황제로부터 받은 전화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승만은 고종을 “4200년 한국의 왕통계승사상 가장 허약하고 겁이 많았던 임금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1부2권, 나남, 2008, p234)
풍경2: 매국 혹은 망국 군주 고종
독립협회 간부들이 여전히 수감 중이던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졌다. 2월 17일 고종은 일본군 요청에 따라 창덕궁을 일본군 12사단 병영으로 사용하도록 칙허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23, 2.(144)창덕궁 일병 병사 사용칙허건)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제국 정부와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제국 영토 어디든 임의로 일본군이 군사용지로 수용할 수 있게 된 협정이다. 2월 28일 고종은 본인과 순종, 영친왕 이름으로 백동화 18만원을 일본군 군자금으로 기부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3월 18일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 친서를 들고 고종을 알현했다. 3월 22일 이토는 “군자금을 받은 답례”라며 일본화 30만엔이 입금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예금 통장을 고종에게 헌납했다. 고종은 “거절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이를 수납했다.(영국외무성, Jordan to Lansdowne, 1904.3.31., FO/17/1659; 일본외무성, 앞 책, p297~298, ‘황실 금원 기증 시말’) 그해 5월 6일 일본군은 창덕궁 후원에서 러일전쟁 구련성 전투 승전 기념 파티를 열었다.(1904년 음력 3월 21일 ‘승정원일기’) 한 해 전인 1903년 8월 15일 이 황제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었다. ‘전쟁이 터지면 응당 사람을 시켜 일본 군사 숫자와 거동을 정밀하게 밝혀내 귀국 군대 세력을 돕겠다.’(‘러시아문서 번역집’4(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자료총서), 24.국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 선인, 2011, p63) 이 모순된 상황을 두고, 일본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정세에 해박했던 지식인 윤치호는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의 실정이 수치스럽게도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1904년 5월 6일 ‘윤치호일기’)
1905년 5월 대마도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격침시켰다. 전쟁은 일본 승리로 끝났다. 그해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일본 손으로 넘어갔다. 강화조약을 주선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두 달이 지난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체결 1주일 전인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궁중 내탕금이 궁핍한’ 고종에게 이토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상납했다. 상납 형식은 무기명예금증서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 11.1~3(195) 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1월 29일 이토 히로부미가 득의양양하게 귀국했다. 전날 귀국 인사차 입궐한 이토에게 고종이 말했다. “경은 지금 수염이 반백이다. 이는 오직 국사에 매진한 결과가 아닌가. 이제 일본 정치는 후임 정치가에게 맡기고, 남아 있는 검은 수염으로 힘써 짐을 보필해 달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5, 7.(2)한국파견대사 이토의 복명서)
풍경3: 그날 이상설, 김구, 이승만
협상 실무를 담당한 대신들을 처단하고 조약을 취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체결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며 민간에 조약 파기 운동을 요구했다. 11월 23일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상소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 차라리 폐하가 사직을 위해 죽어(決志殉社·결지순사)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말라.”(1905년 11월 23일 ‘대한매일신보’) 이토가 귀국하던 11월 29일 위정척사파 거두 최익현이 “자살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의리를 듣지 못했는가”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숱한 상소에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답했다.(1905년 11월 다수일 ‘고종실록’)
다음날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날, 김구는 종로에 있었다.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 구국기도회가 한창이던 11월 27일 김구와 다른 기독교인들은 집단 상소 투쟁을 결의하고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으로 몰려갔다. 그때 대안문은 현 태평로 한가운데에 있었다. 상소문은 이준(李儁)이 지었다.(김구, ‘백범일지’ 영인본, 한국교과서주식회사, 2016, p180) 상소 투쟁 나흘째인 11월 30일 김구 일행은 공개 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종로로 이동했다.
그때 종로에서 김구가 이상설을 보았다. ‘(민영환 상가에) 조상을 하고 큰길에 나서니 웬 사십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 바람으로 피 묻은 흰 명지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김구, 앞 책, pp. 181, 182)
민영환의 비극적 부고(訃告)에 이상설 또한 거리에 나와 연설을 한 뒤 바위에 머리를 던진 것이다. 연설은 이러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백성이 깨닫지 못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민영환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일조각, 1998, pp.45, 46)
김구가 남긴 기록에서 이상설에 대한 특별한 소회는 읽히지 않는다. 이상설과 민영환은 황실과 종묘와 사직을 지키던 근황파요 김구는 기독교를 통해 근대(近代)에 눈을 뜨고 있던 새로운 인격이었다. 김구가 살던 황해도를 포함해 조선왕조 내내 차별받던 서북 지역은 기독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다.(손세일, 앞 책, p263) 그렇게 1905년 11월 30일 서울 종로 거리 한복판에서 봉건과 근대가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1904년 10월 9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학원’ 개교식이 열렸다. 배재학당 출신 주시경이 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교장에는 두 달 전 출옥한 동문 이승만이 선출됐다. 이승만은 개교 3주 만인 11월 4일 미국으로 떠났다. 이승만에 따르면 “민영환, 한규설 제씨(諸氏)가 상의해 미국에 지원을 청하기로 했다.”(이승만, ‘독립정신(1945)’, 독립정신 중간에 붙이는 말씀’, 정동출판사, 1993, p298) 수중에는 황제 고종이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 편지가 들어 있었다. 공식 사절이 아니라는 뜻이다.(손세일, 앞 책, p235)
1905년 8월 5일 이승만은 뉴욕에서 미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났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작성해준 청원서를 대통령에게 주고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힘을 동반하지 않은 외교 투쟁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루스벨트 정권은 철저하게 일본과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면담 3개월 뒤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체결 11일 뒤인 11월 28일 주대한제국 미국공사 에드윈 모건이 대한제국에 공사관 철수를 통보했다. 외국 공관 가운데 첫 번째였다.(‘사료 고종시대사’ 28, 1905년 11월 28일 미국 공사 모건의 통지)
장구한 500년 세월을 버텼던 조선의 중세(中世)가 그렇게 멸망했다. 이승만은 이후 대학에서 공부와 외교 활동을 병행했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까지 김구는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몰두했다.(김구, 앞 책, p182)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이어 1907년 대안문 앞 상소 투쟁을 벌였던 이준과 함께 고종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됐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5년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당수는 광무제 고종을 추대했다.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고종은 1919년 죽었다. 홍영식과 김옥균과 김홍집과 어윤중 같은, 새 시대를 열망하던 인물들은 거칠게 닥쳐오는 근대를 보지 못하고 처형됐다. 이제 전혀 새로운 주인공이 새로운 나라, 근대 대한민국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다.<’근대로 가는 길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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