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시선 의식하는 우리의 ‘잃어버린 얼굴’ 그린다
파우치를 열자, 색연필 20여 개가 쏟아져 나왔다. 폴란드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요안나 콘세이요(52)의 사인 방식이다. 하늘색, 초록색, 흰색… 색연필을 하나씩 집더니, 정사각형의 픽셀(디지털 화상을 이루는 최소 단위)로 된 사람을 그렸다. 픽셀은 최근 국내 번역 출간된 그림책 ‘잃어버린 얼굴’(사계절)의 주된 모티브. 콘세이요는 “있으나 없는 것을 보여주려고” 픽셀에 주목했다. 책 출간과 국내 전시에 맞춰 방한한 그를 25일 오전 서울 한남동 알부스 갤러리에서 만났다.
이번 책은 5년 전 콘세이요에게 세계적 권위의 아동문학상인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픽션 부문)을 안겨 준 ‘잃어버린 영혼’의 후속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글에 콘세이요의 그림을 더했다. 콘세이요는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작가다. 그간 그림책, 에세이 등 14권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잃어버린 영혼’은 약 2만2000부 판매될 정도로,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이가 많다.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을 환기하는 작품을 주로 그려 왔다. 전작이 현대사회의 빠른 속도에 튕겨져 나간 개인의 영혼을 그렸다면, 이번엔 타인의 눈에 비치는 얼굴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누구나 좋아하는 ‘또렷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있다. 셀카를 찍을 때마다 그의 얼굴은 흐려지고, 결국 없어진다. 또 다른 얼굴을 찾아 나서지만, ‘또렷함’이란 사실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를 ‘픽셀’에 접목했다. 특히 사람의 눈을 한 페이지의 절반 크기로 확대해 픽셀을 그대로 노출시킨 그림이 대표적. 분명 사람이 있는데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그림을 통해 한 소년의 성장 과정, 화려한 도시 이면의 고독한 삶을 섬세하게 읽어내던 독자들은 이 지점에서 멈춰서게 된다. 콘세이요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 순간들이 현대사회에선 당연히 있다”며 “이번 그림이 무섭고 충격적으로 느껴진다면 좋겠다”고 했다.
작가의 무기는 헌 종이와 연필. 오직 연필로 그리고 색칠한다. 가는 선이 그대로 노출된 경우가 많다. 종이도 헌 것을 주로 사용한다. 전작은 누군가 쓰던 회계장부 위에 그렸고, 이번엔 누군가 쓰던 공책·편지지 등을 주로 사용했다. 종이에 빛바램, 벗겨짐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유다. “종이에 가장 잘 맞는 연필과 색연필을 고르는 것이 가장 힘든 작업이다. 지우개를 대지 못하는 종이도 많다. 그럼에도 종이에 담긴 얼룩, 누군가 쓴 글씨가 마치 내게 다정히 말하는 것 같다.” 어릴 적부터 경제적 사정으로 헌 종이를 사용하곤 했다. 이제 헌 종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이번 방한 때 독자로부터 한지로 만든 공책을 선물받았을 정도다. “이제는 죽을 때까지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집에 헌 종이가 많습니다.”
처음부터 길을 찾은 건 아니었다. 약 10년 정도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고민이 들었다. “연필과 색연필, 종이가 굉장히 소박한 재료여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근데 고등학교, 대학 시절 가장 많이 한 게 종이에 연필로 그리는 거였습니다. 어느 시점이 되니까, 제가 만족하는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 독자들에게도 솔직히 다가가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의 무기를 되찾아 그림책 ‘아무개 씨의 수상한 저녁’을 냈다. 그덕분에 2004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뽑히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섰다.
작업의 원동력은 폴란드의 시골 마을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이다. “제가 자란 곳은 굉장히 시골이었고, 시골에는 단순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말이 없고 말을 못하는 분들이었는데, 시각적인 몸짓으로 알려줄 때가 많았죠. 말은 위험하지만, 몸짓은 직접적이면서 다정하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콘세이요의 목표는 폴란드의 시골 마을에 마련한 집을 수리해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 그는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살고 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을 고치고 있어요. 정원도 만들어서 작약도 모란도 심고 싶은데, 일러스트 작가가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천천히 혼자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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