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13> 고사리 이야기

최원준 시인 · 음식문화칼럼니스트 2023. 4. 2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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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쥔듯 이 봄에 돋았다…지지고 볶고 끓이고 소고기 뺨치는 식감

- 어린순 삶아 말려서 수시로 먹어
- 예부터 야들야들 맛에 고기 대용
- 왕에 진상… 지금은 더 귀하신 몸

- 부산선 들깨 해산물 넣고 매집찜
- 제주는 돼지고깃국 육개장으로
- 울릉도는 참고비 나물 무쳐 먹어
- 제사에도 꼭 올리는 필수 식재료

곡우(穀雨)를 즈음해 지리산 자락의 한 마을을 찾았다. 지인이 이곳에서 서사(書舍)를 열고 마을 사람들과 한시(漢詩)를 공부한다. 현대판 선비마을이다. 하루를 기거하며 서재의 책도 마음껏 뒤적이고, 마실 삼아 그의 산자락을 한가로이 거니는 여유도 즐겼다.

고사리는 봄철 어린 순을 채취해 말려두었다가 물에 불려 먹는다. 다양하게 씹히는 식감이 좋아 다른 나물에 비해 활용도가 높다.


서사 뒤로 난 길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얼마지 않아 길섶 사이로 야생차밭이 펼쳐진다. 차나무 가지 끝마다 참새 혀같이 돋아난 연두색 새순이 앙증맞다. 차밭 길 군데군데 두릅나무와 엄나무, 가죽나무들 또한 새순을 조랑조랑 달고는 초록초록하다. 온산이 신록으로 눈이 시리다. 차밭 길을 걷다 발아래로 눈길을 주자, 눈 가는 데마다 고사리순이 지천이다. 따뜻한 볕을 받으며 주먹 꼬옥 쥔 고사리가 한창 땅을 박차며 일어서고 있다. 발길 닿는 데마다 옹기종기 온통 고사리밭이다.

평소 고사리를 즐기시는 어머님이 생각나 한 개 꺾어본다. 고사리 줄기를 잡고 가볍게 힘을 주니 ‘똑’하며 쉽게 꺾인다. 그리고 부드럽고 경쾌한 손맛이 전해진다. 그렇게 시작된 고사리 꺾기는 두어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함께 간 일행도 동참했는데, 손에 손마다 초록색 고사리가 한 보자기씩 들려져 있었다.

▮국내서만 360종 자생

부산 매집찜


고사리는 우리나라 산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로, 봄철 어린 순을 채취해 삶아 말려두었다가 물에 불려 여러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야들야들, 잘근잘근, 존득존득 다양하게 씹히는 식감이 좋아 다른 나물에 비해 그 활용도가 월등히 높다. 잎이 피기 전 연두색 솜털에 싸여 있을 때 채취하는데, 마치 주먹을 꼭 쥔 아기의 손처럼 조그맣게 말려 있는 순을 식용으로 사용한다. 채취한 고사리는 삶아서 햇빛에 널어 말렸다가, 두고두고 여러 가지 음식으로 조리해 먹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360 여종의 고사리가 자생하고 있다는데, 생김새로 구분하면 크게 ‘고사리’와 ‘고비’로 나뉜다. 고비는 고사리에 비해 잎이 넓고 크다. 제주에서는 고사리의 몸 색깔에 따라 ‘먹고사리’와 ‘백고사리’로 나누기도 한다. 먹고사리는 곶자왈 덤불 등에서 자라 ‘자왈 고사리’라고도 부르는데, 음지에서 자라 몸 색이 검다. 백고사리는 몸 색이 초록색을 띠는데 한라산 자락의 볕을 잘 받고 자라 ‘볕고사리’라고도 부른다.

▮육개장·전·나물까지

이러나저러나 우리나라 사람만큼 고사리를 좋아하는 민족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상의 제사상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식재료인 데다가, 전국 팔도의 사람들이 모두 즐겨 먹으면서, 이역의 땅에서 동포들이 ‘망향의 음식’으로 꼭 챙겨 먹는 음식 또한 고사리이기에 그렇다.

이 고사리는 조물조물 나물로 무쳐 먹고, 고깃국에 넣어 식감을 더해주고, 비빔밥과 여러 가지 찜에도 단골로 들어가는, 쓰임새가 요긴한 음식 재료이다. 요즘은 소고기보다 더 비쌀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하기에 고사리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음식으로 만들어 먹고, 다양한 방식의 조리법으로 활용되어 왔다. 현재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 중 고사리를 활용하는 음식으로는 제주도의 ‘고사리 해장국’과 ‘먹고사리 나물’이 있다. 울릉도 ‘참고비 나물’도 울릉도의 고급 음식 중 하나이다. 고사리가 중요한 비중으로 들어가는 향토음식에는 안동의 ‘헛제삿밥’, 부산 기장의 ‘매집찜’ 등이 있겠다.

이들 음식을 일별하다 보면 나물이나 해장국, 비빔밥과 나물찜 등으로 조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쓰임의 목적도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음식이나 가문의 잔치, 마을공동체의 행사 음식에 주로 쓰였다. 주요한 날, 주요한 음식상에, 주요한 음식으로 귀하게 쓰였다는 뜻이다.

제주 먹고사리 나물(왼쪽), 제주 고사리육개장


특히 제주도는 고사리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이 발달했다. 제사상에 제물로 올리는 것은 기본이요, 돼지고깃국에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고사리 육개장’을 비롯해서 고기와 함께 지져낸 ‘고사리 고기 지짐’, 달걀물을 입혀 구워낸 ‘고사리 전’, 당면과 여러 채소를 함께 볶아낸 ‘고사리 잡채’ 등 다양한 향토음식이 있다.

특히 고사리 해장국은 몸국과 함께 제주를 대표하는 탕국으로, 잔치나 초상 등 많은 손님을 치르는 마을의 대소사에는 빠져서는 안 되는 행사 음식이다. 제사상에 꼭 올리는 음식으로, 제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정성껏 대접했던 음식 중 하나이다. 주로 ‘고사리 장마’(4월 초 제주도의 짧은 우기) 때 채취해 말려놓았다가 쓰는데, 줄기가 굵으면서 속이 비어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고사리의 독특한 향이 좋아 인기가 높다. 그래서 예부터 왕에게 진상하던 진귀한 식재료이기도 했다.

울릉도에서는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섬 고비’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참고비’라고도 불리는 울릉도 고비는 일반 고사리보다 맛과 식감이 훨씬 뛰어나다. 소고기 맛이 난다고 하여 ‘고기나물’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안동 헛제삿밥


몇 년 전 구절양장 산길을 따라 나리분지에 오른 적이 있다. 그곳 너와집 형태의 식당에서 나리분지의 특산물인 ‘참고비나물 볶음’을 먹었었다. ‘삼나물(눈개승마)회’, ‘감자더덕파전’에 ‘씨껍데기술’ 등과 함께 한 상 차려졌었다. 참고비나물의 맛은 고사리나물과 비슷한데 더 통통하고 더 부드러웠다. 볶아 놓으니 연한 고기를 씹는 느낌에 맛 또한 고기와 비슷했다.

부산에서는 고사리를 넣고 만든 음식 중 대표적인 것이 기장의 ‘매집찜’이다. 매집찜은 기장의 전통 향토요리로 집안 대소사나 잔치 등에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르는 음식 중 하나다. 얼핏 보기에는 다양한 나물에 찹쌀가루와 들깻가루를 넣고 걸쭉하게 쪄낸 ‘나물 찜’과 흡사한데, 기장의 갖은 해산물과 나물이 총동원되어 들어간다. 특히 갯것은 애지(떡청각), 땅의 것은 고사리가 주요 식재료로 소용된다.

▮한땐 소고기 대용식품

여하튼 지리산 자락에서 꺾어온 고사리를 지인의 집에서 데치고 좋은 봄볕의 마당에서 말린다. 반나절쯤 지나니 초록의 통통하던 고사리가 검은색의 바짝 마른 건고사리가 되었다. 부피와 무게는 거의 10분의 1로 줄었다. 이 고사리로 무쳐 먹고, 구워 먹고, 지져 먹고, 쪄서 먹고, 국도 끓여 먹을 요량이다. 벌써 몸에 지리산의 푸른 물이 들어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나물 식재료, 고사리. 지금은 소고기보다도 더 비싼 식재료이지만, 한때 소고기 식감으로 밥이나 국에 넣어 소고기 맛을 대신했던 대용식품이기도 했다. 궁궐, 여염집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우리 민족의 입맛을 충족시켜 준 착한 음식이 고사리였다. 비빔밥이나 육개장 등 고사리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때, 한 번쯤은 고사리의 이러한 성정을 헤아려 먹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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