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공부한 끝에 쿵이지 됐다” 취업난 中 청년들의 신세한탄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2023. 4. 26.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벌찬의 차이나 온 에어]3월 청년 실업률 20% 육박, 최고 스펙 갖춰도 최악 취업난… 장삼 걸친 가난뱅이에 빗대
1919년 루쉰의 단편소설 ‘쿵이지’의 삽화. 주인공 쿵이지는 과거시험에 실패해 제대로 밥벌이를 하지 못하고 체면만 차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웨이보 캡처

“람보르기니를 운전하는 그대여, 열심히 살라고 내게 조언하지 마. 나는 밝고 명랑한 쿵이지(孔乙己), 힘없고 가난해 아등바등 살지.”

25일 중국 베이징 시내에서 만난 취업 준비생 톈모(24)씨가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곡”이라며 들려준 노래에서 이런 가사들이 흘러나왔다. ‘밝고 명랑한 쿵이지’라는 제목으로 창작자 미상의 이 노래는 지난달 중국 소셜미디어 비리비리에 올라와 400만 조회 수를 기록하고 곧바로 삭제됐다.

쿵이지는 루쉰의 동명 소설(1918년작)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청나라 말기의 도태한 지식인이다. 쿵이지는 고관들의 옷인 장삼(長衫)을 걸친 ‘높은 신분’이지만, 주점에선 자리에 앉지 못하고 막노동꾼처럼 서서 술을 마시는 가난뱅이다. 중국에서는 높은 스펙의 청년들도 올해 들어 최악의 취업난을 겪자 스스로를 쿵이지에 빗댄 글을 쓰거나, 노래를 만들고 있다. 이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신세 한탄 글은 ‘쿵이지 문학’으로 불린다.

중국 청년들은 “열심히 공부한 끝에 쿵이지 신세가 됐다”고 한다.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서는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사를 조이는 노동의 기쁨을 알고 만족했을 텐데” “윗세대가 ‘대학에 못 갔다’ 했을 때 우린 비웃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대학까지 나왔는데 출세를 못 했느냐’며 우리를 조롱한다” 등의 글이 수천만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쿵이지 문학’은 중국판 네이버인 바이두에서 인기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상하이에서 취업 준비 중인 장모(22)씨는 “중국 대학생들은 코로나 봉쇄 기간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미친 문학(논리에 맞지 않는 감정 해소 글)’을 쓰거나 ‘탕핑’(躺平·드러누워 포기한다는 뜻)을 택해야 했고, 졸업 후엔 쿵이지로 전락했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학력 인플레와 IT 기업 인원 감축, 저성장 시대 여파로 고학력 청년들이 최악의 취업난을 겪고 있다. 청년(16~24세) 실업률은 3월에 19.6%를 기록해 지난해 7월에 이어 사상 둘째로 높다. 중국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칭화대조차 지난해 10월 배출한 졸업생 8000여 명 가운데 62%만 취업에 성공했다. 중국 전역에 올해 사상 최대인 1158만 명의 대졸자와 100만 명의 하이구이(海歸·유학 후 귀국자)가 공급과잉 상태인 노동시장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코로나 기간에 누적된 실업자들도 취업 시장에 쏟아진다.

중국 정부는 ‘안티 쿵이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중국 국영 CCTV는 전공 분야에서 경력을 쌓는 대신 길거리 음식 판매나 과일 재배와 같은 저숙련 일자리로 돈을 벌었다는 대학 졸업생들의 사례를 연일 소개하고 있다. 지난달 공산주의청년동맹은 젊은 졸업생들이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는 일’을 거부한다고 비난하면서 “양복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농촌으로 가라”는 글을 올렸다.

쿵이지 문학을 쓰는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 간에 갈등은 커지고 있다. 중국의 소셜미디어에서는 “청년 층이 눈만 높아서 일을 가린다”는 글이 올라온다. 중국 최대 자동차 유리 업체 푸야오그룹의 차오더왕 회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쿵이지 문학을 비판하며 “중국 젊은이들이 제조업 진출을 꺼리고 있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중국 청년들은 “장삼을 벗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처우가 보장된 직장을 원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요즘 중국 인터넷에선 ‘장삼은 벗었다, 내 일자리는 어디에’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