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 눈먼 자들과 눈뜬 자들

기자 2023. 4. 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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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문학사회학은 작가의 삶과 그의 창작 생활을 지배하는 사회적 배경이나 시대정신에 먼저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다른 문학세계를 형성한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또 작가의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상황은 비록 다를지라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 제기는 물론, 때로는 시대를 앞지르는 고민을 담아 그려내는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기도 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포르투갈로 3년 반 전에 이주했을 때 이곳의 문학과 예술세계에 대해 나도 사실 어두웠다. 국민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나 전설적인 ‘파두’ 가수 아말리아 호드리게스(1920~1999), 그리고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조제 사라마구(1922~2010)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이 거의 모두였다.

2020년 봄부터 지구촌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코로나는 포르투갈도 비켜가지 않았다. 죽은 듯이 고요한 거리와 해변에 ‘나다니지 말고 집에 머물라’는 순찰차의 경고 소리만 괴기한 여운을 남겼다. 바로 이때 떠올렸던 소설이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1995)였다. 그의 소설이 마치 코로나 사태를 예견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어느 날 오후, 차를 운전하던 한 남자가 신호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 이후 안과 의사를 포함해서 그와 접촉한 모든 사람은 눈이 멀게 된다. 시야가 모두 하얀색으로 뒤덮여 버리는 ‘백색 실명’으로, 정부는 이를 전염병으로 선포하고 눈먼 자들을 모두 격리 병동에 강제 수용하기에 이른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남편을 돌보기 위해서 가짜 환자로 잠입, 이 수용소의 충격적인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 경비병들은 자신들도 전염될까 봐 수용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수용자들 가운데 억압과 폭력의 구조가 형성되면서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타난다. 의사의 아내는 이들 중 우두머리를 가위로 찔러 살해하고 격리 병동에도 불을 지른다. 병원 밖으로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뛰쳐나갔지만, 이를 지키던 군인들은 이미 사라졌다. 이들도 이미 눈이 멀었던 것이다. 눈이 먼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시가지를 헤매고 오물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생활한다. 눈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남편과 몇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 날 기적처럼 맨 처음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남자부터 시력이 회복되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점차 시력을 되찾는다.

정치 문제점 들춘, 작가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의사 부인이 이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독백조로 눈이 먼다는 것은 선과 악이나 옳음과 그름을 가릴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것’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이성을 잃어 적절한 분별이나 판단을 못하는 행위’를 지적하는, 우리말 ‘맹목(盲目)’의 뜻풀이를 하는 것 같다.

도대체 이러한 맹목으로 한 사회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우리가 비록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맹목적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으려는 ‘눈뜬 장님’이 넘쳐나는 세상을 향한 작가의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면 사라마구는 누군가. 포르투갈 중부의 조그마한 농촌마을 아지나가에서 가난한 농업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돈이 없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기술학교를 나와 자동차 정비공이 되었다. 그 후 독학으로 문학세계와 접촉하면서 평론가·번역가·기자·잡지 편집인 등으로 활동했으며 살라자르 독재체제와 이의 강력한 지지세력의 하나였던 가톨릭 교회와는 항상 갈등 속에서 살았다.

1969년, 당시 금지되었던 포르투갈 공산당에 가입해 사망할 때까지 당원으로 남았다. 1974년 4월25일 청년 장교단이 주동이 되었던 ‘카네이션 혁명’으로 40여년에 걸친 독재체제는 무너졌고, 사회도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보수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늘 갈등을 빚었던 그는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의 작은 섬 란자로테로 ‘망명’, 그곳에서 87세에 사망했다.

리스본의 역사적인 알파마 구역에 있는 ‘조제 사라마구재단’ 건물 앞 그의 재가 뿌려진 땅에 고향에서 옮겨 심은 100년 된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 밑에는 ‘그러나 그 의지는 대지의 것이기에 하늘의 별로 향해 올라가지 않았다’는, 그의 소설 <수도원의 비망록>(1985)의 마지막 구절이 새겨진 묘석 판이 박혀 있다.

그는 착취와 가난으로 병들었던 포르투갈 농업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공동체의 건설, 팔레스타인의 독립, 세계화의 강력한 한 축인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비판 등에 이르는 참여의 행보와 비판의 목소리를 숨을 거둘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작가이자 시민으로서 정치적 발언과 행동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정치인들은 ‘조직화한 거짓말쟁이’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가 현실 정치와 항상 충돌하면서 문제의식을 마술적인 사실주의의 문체로 승화시킨 소설 중에는 <눈뜬 자들의 도시>(2004)도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4년 전에 창궐했던 백색 실명으로 말미암아 지옥과 같은 날들을 경험했던 도시에서 치러지는 선거로 시작된다. 투표 결과는 그러나 70%가 백지 투표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믿었던 당국은 이 결과를 무효로 하고 두 번째 투표를 시행한다. 결과는 전보다 더 나쁜, 백지 투표 83%였다. 유권자 어느 누구도 사전에 이런 투표행위를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그렇게 나타났다.

눈뜬 자와 눈먼 자 사이, 서울은?

정부는 이 도시에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마치 무정부적인 혼란이 있는 것처럼 언론을 통해 가짜뉴스를 흘리면서 주동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어 많은 시민을 납치하고 감금한다. 비록 선거로 선출된 정부라고 할지라도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스스로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원칙마저도 파괴한다.

집권자들은 과거의 백색 실명과 지금의 백지 투표 사이에 분명히 연관성이 있으며 이번 사태를 획책한 주동자도 있다고 확신한다. 용의선상에 떠오른 몇 인물들 가운데는 과거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도 들어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한 한 조사관은 이 같은 혐의가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자세한 보고서를 검열을 피해 한 신문에 공개하자 그는 물론 의사의 아내도 암살되고 만다. 이 같은 테러를 기획한 내무부 장관은 시민의 반수 이상이 이미 거리에 나섰고 나머지도 이에 곧 합세할 것 같다는 급한 정보를 총리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총리는, 모든 일은 가족과 같은 우리끼리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며 그를 즉각 해임하고 법무부 장관을 그의 후임으로 임명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눈먼 개인의 도덕적 파산과 연대성의 붕괴를 주제로 삼았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지난날 아귀다툼했던 백색 실명자들이 민주주의의 파산에 대해 함께 저항하는 모습을 그렸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이 도시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눈뜬 자들의 도시>에 묘사된 여러 정황은 이 도시가 리스본이라는 것을 알린다. 그러나 이 같은 도시가 이 지구 위에 어디 리스본뿐이겠는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통치권력을 위임받은 정치가일지라도 많은 경우 한 번 차지한 특권을 계속 지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 시민의 적극적인 저항에 부딪혀 결국 권좌에서 쫓겨난 사건들이 서울에서도 발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최근 들어 서울이 눈먼 자들의 도시인지, 아니면 눈뜬 자들의 도시인지, 헷갈리게 하는 소식들이 자주 들린다. 물론 승자독식의 제왕적인 권력구조도 문제지만, 일단 당선만 되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된다고 믿는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이 더 문제다. 소통과 협치는 선거전에서나 필요한 용어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오로지 열혈 지지자들만이 찾는 이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내로남불식 마구잡이 정치판에 유권자의 대다수가 정치가는 물론 정치 자체도 혐오하고 등을 돌린다. ‘촛불혁명’의 열정이 이렇게 냉소로 돌아온 근본 원인에 대한 철저한 통찰과 반성 없이, 어떻게 <눈뜬 자들의 도시>처럼 백지 투표를 위해 유권자들이 스스로 투표장을 찾겠는가.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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