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무너지는 대학원과 기초과학 경쟁력
부여에 갔다가 백제의 미(美)를 품은 부소산성에 들렀다. 정상에 가니 사자루라는 누각이 반겼다. 멀리 보이는 백마강과 부여의 전경이 아름다웠지만 눈길을 끈 것은 누각에 걸린 시판(詩板)과 기문(記文)들이었다. 다섯 자씩 네 행으로 이뤄진 한시(漢詩) 오언절구(五言絶句)도 보였다. 학창 시절 한문을 배운 덕에 띄엄띄엄 읽을 수 있었지만 내용을 음미할 수준은 못 됐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이런 글들을 읽고 뜻을 전해줄 전문가들이 사라지면 백제의 역사와 문화도 함께 사라질까 걱정됐다.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같은 역사왜곡이 날로 심해진다. 이를 이겨내려면 강한 경제력과 외교적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이나 문헌을 고증하고 해석할 국가적 역량이 없으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우리 것을 지켜내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문학, 역사, 언어, 지리 같은 기초학문을 지원하는 것은 '시혜적 보호'가 아닌 '전략적 투자'로 봐야 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을 다른 나라 학자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식시장에서 이차전지 회사가 화제다. 테슬라에 배터리를 납품하는 회사의 주가는 상한가였다. 기후 환경과 탄소중립에 관심이 커지고 규제가 많아질수록 전기자동차산업은 성장할 것이다. 우리 기업이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기술에서 초격차 우위를 가져야 한다. 특히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분야가 중요한데 전문가들은 물리, 화학 같은 기초과학의 토대가 얼마나 튼튼하냐가 관건이라고 한다. 엊그제 퇴근길에 '화학관' 실험실의 불이 밤늦게까지 켜진 것을 보았다.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기초학문과 과학의 경쟁력은 어디서 오나.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는 힘과 기술 경쟁력은 어떻게 길러지나. 그것은 바로 대학원 교육과 연구를 통해서다. 당장 기업에서 일할 인재를 육성하는 게 학부 교육의 역할이라면, 나라와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것은 대학원이 길러내는 전문가와 그들이 창출하는 첨단지식이다.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미국이 가진 경쟁력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MIT, 스탠퍼드대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원이 배출하는 전문가집단과 그들이 만들어낸 지식 자산이 초강대국 미국을 만들었다고 답할 것이다.
우리 대학원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위기다. 우수한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외면한다. 석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하려면 적어도 4~5년 걸리는데 학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대학졸업 후 돈을 벌어도 시원치 않은데 돈을 써야 하니 부모님 눈치가 보인다.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면 좋겠지만 연구중심대학조차 엄두를 내기 어렵다. 십수 년 동안 등록금은 동결되고 정부 지원도 적어 재정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장래가 불투명한 것도 대학원 진학을 꺼리게 만든다. 지방대학이 무너지면서 교수 채용 시장도 위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공대 실험실은 외국인 학생이 많다. 누군가는 실험실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초과학과 연구에 매진하는 대학원생의 상당수가 외국인이라면, 대부분 졸업 후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국가 인재양성 전략 차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학이 당장 산업현장에서 일할 인재를 길러내는 일은 중요하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에 기초연구는 우선순위가 아닐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을 바꾸는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낸 곳은 대학원 연구실이었다. 노벨상 수상자는 대부분 밤마다 불 켜진 대학의 실험실에서 나왔다. 대학과 기업의 창조적 협업과 분업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미래를 꿈꾸는 전문가를 키우고 첨단지식과 기술을 창출하는 일은 대학원의 몫이다. 그러기에 우리 대학원은 너무 약해졌다. 대책이 필요하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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