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때 만든 광화문 월대, 남북 길이 48.7m 첫 확인
광화문과 이어진 ‘어도’ 흔적 발견
1890년 이전 모습으로 복원 예정
지금 서울 광화문 앞을 지나는 차량들이 곡선 형태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광화문 월대(越臺·月臺)의 발굴과 복원 작업 때문이다. 월대란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한 넓은 대(臺)를 말한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돈화문, 덕수궁 대한문 등에 설치됐는데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른 것은 광화문 월대뿐이었다. 이 월대의 19세기 후반 축조 당시 규모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9월부터 진행된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월대 발굴조사의 결과를 25일 공개했다. 광화문 월대는 남북 길이 48.7m, 동서 폭 29.7m로 육조거리를 향해 뻗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 광화문 중앙문과 이어지는 너비 7m의 어도지(御道址·임금이 지나가던 길의 자취)도 확인됐다. 월대의 서편과 달리 동편은 비교적 고종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조사에서 돋보이는 점은 월대 남쪽의 계단 일부가 고스란히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또한 월대의 동·서 외곽에 잘 다듬어진 길이 120~270㎝의 장대석으로 2단의 기단을 쌓고, 내부는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을 교차로 쌓아 주변보다 높게 대를 만들었던 기법도 알 수 있게 됐다.
‘경복궁 영건일기’에 1866년(고종 3년) 축조됐다고 기록된 월대가 이후 4단계로 변화를 거쳤던 사실도 확인됐다. ①처음엔 남쪽에 계단 3개가 있었고 ②중앙의 어도가 계단에서 경사로로 변했으며 ③계단이 동·서 외곽으로 축소되면서 단선 형태의 전차 선로가 설치됐고 ④1923년 무렵 전차 선로의 복선화와 함께 월대가 파괴됐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월대의 복원을 위한 실물 자료를 확보한 것이 이번 조사의 큰 성과”라며 동구릉 등에 이전됐던 월대 부재를 재사용하고 전통 재료와 기법을 통해 오는 10월까지 1890년 이전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배포한 자료 중에서 ‘기록으로 본 광화문 월대’라는 제목으로 옛 기록을 소개하며 세종실록과 세조실록 기사 4건을 인용해 광화문 월대가 조선 초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게 했다. 이 중 한 기사(1431년)는 세종이 월대 축조를 불허했다는 내용이며, 다른 기사들엔 광화문 밖 ‘장전(帳殿·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 ‘채붕(綵棚·일종의 장식 무대)’ 등이 등장할 뿐 월대는 나오지 않는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는 “발굴조사 결과 조선 초 월대와 관련된 구조물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문화재청은 또 간담회용 동영상에서 “월대는 임금과 백성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으나, 1866년 월대 축조 이후 고종이나 순종이 이곳에서 백성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문화재청 측은 “월대가 궁궐 건축물로서 궁궐 밖과 이어진 유일한 시설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에 대해 “축조 때 월대에 계단을 만들었다는 것은 백성과의 소통 대신 군주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의도”라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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