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 조속 획정, 비례성 강화, 위성정당 방지가 내 목표”[논설위원의 단도직입]
경기 연백군(현 황해남도 연안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피란해 수원에 정착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1973년 13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국무조정실장,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부총리·교육부총리를 역임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을 맡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수원시 영통구에 출마해 당선된 후 민주당 소속으로 수원에서 내리 5선을 했다. 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이다.
선거제 개편하지 않는다면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절대 불가능
여야 숟가락 들고 밥을 먹게 지원
늦어도 상반기까지는 마무리돼야
내년 22대 총선의 선거제 개편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 전원위원회가 20년 만에 열렸다. 정치적 폐해의 온상인 소선거구제를 이대로 놔둘 수 없다는 국민 여론에 부응한 김진표 국회의장(76) 제안으로 성사됐다. 지난 10~13일 여야 의원 100명이 각자의 입장을 피력하고, 이제 여야 협상의 무대로 옮겨졌다. 여야 지도부가 결단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국회의장이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지난 21일 국회의장 집무실에서 만난 김 의장은 “여야가 숟가락을 들고 골라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다하겠다”고 했다.
김 의장은 늦어도 상반기 중에는 선거법 개정 작업이 마무리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정치는 실종 상태다. 과반 의석의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양곡관리법·간호법·방송법 등 쟁점법안들이 줄지어 본회의에 직회부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김 의장은 “양당이 사전에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법안들”이라며 거듭 여야 협의를 촉구했다. 양곡관리법처럼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입법이 다시 무산될 경우 국회 권위가 실추된다는 걱정도 컸다. 여야 간 대화·타협을 유도할 요술방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고심이 읽혔다. 김 의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위성정당 이번에 또 나오면
국민들이 국회 해산하라고 할 것
의원 정수 늘리기는 현실적 어려움
■ “선거제 개편, 이제 협상의 시간”
- 20년 만에 열린 전원위원회는 어떻게 총평하겠습니까.
“현행 소선거구제가 5년 단임 대통령제와 결합하면서 승자독식, 극한대립, 진영 중심의 정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역구 253석에서 한 표라도 이기면 당선되는 이 선거제하에서 국민 의사의 절반은 아예 무시된 채 국회가 구성됩니다. 우리 정치 환경에서 각 당 지도부가 ‘전체 국민을 위한다’는 것은 립서비스고, ‘내 책임으로 치르는 선거에서 이겨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모든 정치적 행동과 의사 결정 기준이 지지세력 결집입니다. 정당 회의나 국회 회의를 지지세력 결집을 위한 선전장으로까지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선거제를 개편하지 않으면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어요. 의원 대다수가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거법 개정이 당 지도부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의원들이 터놓고 토론할 장이 없었어요. 이번 전원위원회를 통해 대표성·비례성·다양성 제고, 지역주의 완화, 지역소멸 문제 대응 등 선거제도 개선 방향에 대한 여야 공감대가 확인됐습니다. 오랜만에 ‘토론다운 토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향후 선거제 논의는 어떻게 되나요.
“이제 토론을 바탕으로 여야가 협상할 시간입니다. 전원위원회에서 나온 내용을 수렴하기 위한 소위나 협의체를 조속히 설치해 여야 합의로 단일안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5월 중, 늦더라도 상반기까지는 선거법 결의안 수정안이 도출되기를 바랍니다. 국민의 90.9%가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어요. 총선을 앞둔 상황이니 의원들도 선거제 개혁의 명분을 외면하기 힘들 것입니다.”
- 위성정당은 반드시 막는 건가요.
“위성정당 출현 방지에는 여야 모두 의견이 일치합니다. 본래 비례대표는 그런 용도가 아닌데, 위성정당은 다른 목적은 없고 거대 양당이 자기 진영에 싸움 잘하는 전사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썼어요. 그러니 국민들이 불신을 넘어 분노한 것이죠. 어차피 지금 선거법으로 선거를 치를 수 없습니다. 국민들은 또 위성정당이 나오면 국회를 해산하라고 할 겁니다. 나라도 그럴 겁니다. 고쳐야 합니다. 기왕 고칠 거면 제대로 토론해서 고치자는 겁니다.”
- 선거구제 개편 논의에서 최대치와 최소치가 있나요.
“선거제 개혁의 성공 기준은 조속한 선거구 획정, 다양성·비례성·대표성을 제고하는 선거제 마련, 위성정당 방지책 마련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이루어낸다면 크게 성공한 것이고, 일부만 이뤄내도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욕심 같아선 세 가지 모두를 이뤄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비례대표제 취지를 살리기 위해선 300명인 국회의원 정수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혼합제 선거제를 가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 비례대표 의석 비율은 41.6%지만, 한국은 15.7%에 불과해요. 비례성을 높이려면 비례대표를 증원해야 하는데 국회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상황에서 의원 정수를 확대해 비례의석수를 늘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신 도농복합선거구제를 도입할 경우 지역구 수를 줄여 비례대표 숫자를 늘리는 방법은 있죠. 비례대표제의 신뢰성 확보 위해, 국민이 선호하는 후보에게 직접 투표하는 개방형 명부제를 도입해 선택권을 돌려드리는 것도 고려 방안 중 하나입니다.”
- 선거제 협상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우리 정치 상황과 환경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거 직전에 여론 지형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여야 지도부 모두 혹시 내가 잘못 결정했다가 치명타가 오는 것 아니냐고 걱정해 자꾸 뒤로 미뤘어요. 선거 한 달 전쯤 결정하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결정을 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국회의장실이 전원위에서 발언한 여야 의원 100명(민주당 53명, 국민의힘 38명, 비교섭단체 9명)의 토론 내용을 분석했다. 지역구 선출 방식에 대해 국민의힘은 도농복합선거구제(44.7%), 민주당은 소선거구제(39.6%)를 선호했다. 비례대표 선출 방식으로 국민의힘은 전국·병립형제(42.1%)에, 민주당은 권역별·(준)연동형제(56.6%)에 상대적으로 무게를 뒀다. 여야의 입장이 확연히 갈려 선거제 개편 협상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 여야 협상이 난관일 때 의장으로서 돌파할 복안은 있겠죠.
“협상의 최종 책임은 여야 지도부에 있습니다. 지도부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말고, 집중토론을 거쳐 각 당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합리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국회의장 역할은 협상이 이뤄지도록 선택지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전원위원회 토론에서 나온 의견 차이를 분석해서 각 당에 제공했어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등과 함께 공론화 조사를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전문가 집단인 한국정치학회·선거학회·정당학회 등 3개 학회가 지금까지 제기된 모든 논의를 토대로 여야에 권고하는 협상안도 만들 겁니다. 국회의장으로서, 여야가 숟가락을 들고 골라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다하려 합니다.”
- 정치개혁을 위한 국회 기득권 내려놓기 논의는 뒷전으로 밀린 것 아닌가요.
“국민의 뿌리 깊은 정치 불신의 원인 중 하나가 의원특권입니다. 의원특권 내려놓기의 구체적 방안으로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방식을 무기명에서 기명으로 바꾼다거나, 의원의 회의 불출석 시 제재를 강화하는 방안들이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 “요술방망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 최근 전세사기 문제가 국회 현안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원내 3당 정책위의장 회의를 통해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 등을 중심으로 견해차를 좁히기로 했습니다. 내가 정부에 있을 때도 비슷한 경제적 스캔들을 많이 봤는데, 이번 건은 우리 사회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 지시로 경매 기일이 연기됐지만 무한정 연기할 수가 없어요. 돈을 댄 금융기관 중에 2금융권이 많은데 파산 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선 정부가 이 모든 변수들을 고려해서 최선을 다해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국회는 필요한 입법 절차를 적극 도와주고 정부의 대처 속도가 늦으면 촉구하고 질책해야 합니다.”
-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민의힘은 전세사기 관련 법안만 처리하자는 입장이지만, 민주당은 쌍특검법안(대장동 ‘50억 클럽’과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과 간호법 제정안도 처리하려고 합니다.
“전세사기 대책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A냐 B냐 중에 선택할 문제는 아니에요. 특검법은 좀 더 논의를 해야 합니다. 간호법의 경우도 국회법 86조에 법사위가 ‘이유 없이’ 60일 이상의 기간을 도과해서 법안을 가지고 있으면, 본회의에 직회부 직상정 의결을 요청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어요. 그런데 법사위가 소위원회 회부를 해서 회의를 한 날이 24일로 60일이 도과합니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처리하는 것이 ‘이유 없이’ 조문을 둔 취지에 맞는 것인지 좀 더 협의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도 경제, 기업을 하는 사람들과 노동자들에게 모두 적용될 수 있어 파장이 큽니다. 의장으로서 여야가 그 중요성을 알고 좀 더 깊이 있게 대화해주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유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장이 요술방망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걱정입니다.”
- 본회의에 직회부되는 법안이 늘고 있습니다.
“본회의에 직회부된 법안들을 보면 양당이 사전에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국회 입법이 무산된 양곡관리법과 같은 전철을 밟으면, 국회 입법권의 권위만 더 실추됩니다. 지난 본회의에서 간호법·의료법 등 본회의 직회부된 법률안에 대해 다시 한 번 여야 협의를 요청한 것은, 국회 스스로 입법권을 지켜내기 위한 일이었어요. 정부와 관련 단체가 의료제도 전반을 둘러싼 협의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여야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합의안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각 정당이 극단적인 소수 세력보다는 국민 대다수가 ‘그만하면 됐다’ 할 때까지 충분히 대화하고 타협해 정치에 대한 국민 신뢰 높여야 합니다.”
- 복합위기에 시민들의 생활은 고단하지만 국회와 정치권은 민생에 아랑곳없이 싸우기만 합니다.
“여야는 서로를 국정운영 파트너로 인정하고 민생과 국익을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해요. 국민의힘은 소수 의석이지만 성공적 국정운영을 위해 협력의 정치를 기획하고 이끌 책임이 있어요. 압도적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국익과 민생문제 해결에 주도적으로 앞장서면서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합니다. 정부 견제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야당 모습만으로는 부족해요. 당장 국민이 체감하는 정치 효능감을 높이기 위해 전세사기 피해 방지 등 민생문제 해결에 여야가 힘을 모으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국민의힘이 대통령실로부터 주도권을 갖지 못해 여야 협상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국회의장이 언급하기에 적절치 않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의 관계는 시대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봅니다. 하나의 모범답안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직회부 법안들은 사전 합의 가능
거부권 되풀이 땐 국회 권위 실추
■ “윤 대통령, 국민·야당과 소통해야”
- 윤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을 합니다.
“갈수록 악화하는 글로벌 정세에서 한국과 미국이 세계 평화와 지역 안정을 위해 협력해야 할 필요성은 커지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12년 만에 이뤄지는 국빈방문에서 많은 성과를 내길 기대합니다.”
- 윤 대통령이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가능성을 시사하고 양안 문제를 언급해 러시아와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한·미·일이 밀착하면서 대러시아·대중국 리스크가 커지고 있어요.
“윤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에서 질문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답변만 있습니다. 어떤 백그라운드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국회의장으로서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로 생겨난 외교 현안, 외교 갈등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일반론으로 얘기하자면, 균형 외교와 가치 외교 논쟁이 일어났는데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비중이 커졌습니다. 우리를 선진국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나라들도 많아졌으니 그 무게에 맞게 잘 조화롭게 관리해 나가야 됩니다.”
- 윤 대통령이 최근 재정건전성 강화를 위해 재정준칙법(국가재정법)의 조속한 처리를 국회에 요청했습니다. 야당은 긴축 재정을 할 때가 아니라며, 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어요.
“OECD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국가부채비율은 50.3%입니다. OECD 31개국 중 여섯 번째로 건전하고, OECD 평균(122.5%)과 비교해도 양호한 수치예요. 재정건전성 약화는 방심할 수 없는 주제입니다. 올들어 심화한 경기 둔화와 수출 부진의 영향으로 경제성장률 전망이 나빠지면서 향후 국가부채는 더 빠르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살림의 관점에서 재정건전성이 금과옥조일 수는 없습니다. 한국이 코로나19 때 재정을 제때 풀지 않았다면 서민경제에 얼마나 더 큰 피해가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도 고물가, 전세사기,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계층이 많아요. 곳간을 풀 때는 풀어야 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 다음달 10일 취임 1년이 되는 윤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해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대통령이 국민의 생활과 안전에 직결되는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정책 입안 단계부터 국민 여론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국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경제 회복이나 민생경제를 위해 여당과 야당의 협력이 절실합니다. 야당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협치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안홍욱 논설위원 a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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