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칼럼] 기적의 역사

한겨레 2023. 4. 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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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칼럼]고등학교 2학년생들이 20대 후반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조금은 더 안전한 사회가 됐을까.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참사 앞에서 유가영은 이렇게 적었다.
“세월호 참사 때와 달라진 게 하나 없는 듯한 세상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똑같은 말과 상황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요. 놀러 갔다 사고 난 게 자랑이냐는 식의 비방과 혐오,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와 유가족, 부족한 심리치료 지원, 책임을 미루는 어른들과 책임지지 않는 책임자들.”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가족들이 25개동 안산시 시민들에게 노란 꽃을 전달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김탁환 | 소설가

2016년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때였다. 세월호는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고, 단원고 4·16 기억교실은 철거 위기에 빠졌고, 4·16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성과 없이 조사 활동이 종료될 처지였다. 세월호에서 희생자들을 포옹하여 모시고 나온 민간 잠수사들의 활동을 증언하던 김관홍 잠수사가 세상을 떴다. 세월호 참사의 물증과 기억들을 지우려는 시도들이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벽은 높고 두꺼웠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대로 잊히고 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앞이 막혔을 때는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더 끔찍한 환난의 시절을 견디며 기어이 희망을 찾은 사람들에게서 용기를 얻고 방책을 배우려는 것이다. 나는 뒤돌아 살피는 대신 저 벽을 훌쩍 뛰어넘어 더 나은 세상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소설의 등장 시간으로 택한 해가 2025년이다.

2025년이면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2학년생들이 스물아홉살이 된다. 스물아홉살에, 2학년1반 담임 유니나 교사는 세월호에서 학생들을 챙기고 이끌다가 희생됐다. 2014년 그날부터 11년이 지난 후 세상은 얼마나 발전했을까. 또 담임교사의 나이에 이른 생존 학생들은 무엇을 느끼고 그리워하고 고민할까.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이었던 생존자 유가영(26)씨가 지난달 30일 도서출판 ‘다른’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출판사 다른 제공

세월호 생존 학생 유가영이 이달 초 펴낸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를 노란 유채꽃을 바라보며 읽었다. 2016년에 나는 9년 뒤를 상상하며 짧은 소설 ‘제주도에서 온 편지’를 썼지만, 이 책엔 지난 9년 동안 직접 겪은 사실들이 솔직하게 담겼다.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불안과 우울증과 불면증이 겹쳤고, 대학 2학년 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병원에 입원할 만큼 고통이 컸다. 그러나 유가영은 거기서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사와 국가폭력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찾아서 만났다. 1999년에 일어난 씨랜드 화재 참사 유족들이 지은 어린이 안전 체험관도 방문하고, 국가폭력 피해자 단체 ‘진실의 힘’에 찾아가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다. 누군가를 돕는 것.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

2016년 여름이 지나고 불과 6개월 만에 상황은 급변했다. 그 어떤 작가도 상상할 수 없는 변화였다. 수많은 국민이 겨우내 촛불행진을 했고 이듬해 봄 대통령이 바뀌었다. 세월호를 인양했고, 단원고 4·16 기억교실을 4·16민주시민교육원 기억관으로 옮겼으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가 새롭게 이어졌다. 이미 사라지고 바뀐 것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2016년 여름에 걱정한 것처럼 참사의 증거와 기억들이 모두 잊힌 것은 아니었다.

2018년 유가영을 비롯한 네명의 생존 학생은 비영리단체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를 창립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누군가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부터 돌아보고 보듬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귀하고, 트라우마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발걸음이 아름답다.

고등학교 2학년생들이 20대 후반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조금은 더 안전한 사회가 됐을까.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참사 앞에서 유가영은 이렇게 적었다.

“세월호 참사 때와 달라진 게 하나 없는 듯한 세상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똑같은 말과 상황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요. 놀러 갔다 사고 난 게 자랑이냐는 식의 비방과 혐오,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와 유가족, 부족한 심리치료 지원, 책임을 미루는 어른들과 책임지지 않는 책임자들.”

벽은 더욱 교묘하고 단단해졌다. 피해자들을 향한 몰상식한 비난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덮으려 든다. 무책임한 변명으로 시간을 끌면서, 추모의 손길을 막고 기억하려는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던 2016년 여름이 다시 떠올랐다.

기적은 어떻게 소설을 넘어 역사가 되는가. 상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 모두 충격을 받고 상처를 입었다.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상처를 외면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그 참사가 내게 무엇이었는가를 살피고 말하고 쓰고 그리면서, 또 다른 상처로 힘들어하는 피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그때 참사는 빛바랜 사건이 아니라, 내 발목을 따듯하게 밝히고 장벽을 뛰어넘는 반딧불이가 된다. 일찍이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만들고 증명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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