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4·3의 봄 멀었다’ 알리려 30년 만에 조각칼 들었죠”
[짬][짬] 민중미술가 박경훈 작가
19일 찾은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대형 목판화작품 <두무인명상도>(가로 186㎝, 세로 120㎝)가 눈길을 끌었다. 둥그런 돌무덤 형태의 방사탑(액막이탑) 앞에 동백을 든 여인과 죽창이나 총을 든 군복 입은 사람, 교복과 치마저고리 차림의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거사에 나가기 직전 각오를 다지면서 찍은 기념사진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머리가 없다. 목이 잘린 부위는 여인의 동백처럼 붉은색이 칠해져 있었다. 작품을 제작한 박경훈(61) 작가는 이념의 늪에 갇혀 역사에서 지워진 ‘4·3항쟁’ 지도부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4·3 진상규명이 제대로 된 뒤에야 온전한 사람을 그리겠다고 했다. 박 작가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만나 광주에서 전시를 연 배경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4·3의 과제에 대해서 들어봤다.
“4·3은 5·18의 선배입니다. 5·18보다 30여 년 전에 일어난 무장항쟁이죠. 40년 동안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었던 4·3을 부활시킨 동력은 5·18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던 땅에서 전시를 열어 벅찬 느낌입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올해 4·3사건 75주년이자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지난달 30일부터 6월18일까지 박 작가 초대전 ‘4·3 기억 투쟁, 새김과 그림’을 연다. 박 작가는 그동안 수차례 전시를 열었지만 제주가 아닌 지역에서 공립미술관 초대전은 “흔치 않은 기회”라고 했다.
전시는 새김(판화 70여점)과 그림(회화 30여점) 분야로 나눠 1980년대 미술대학 시절 민중미술운동부터 최근작까지 박 작가의 30년 예술인생을 한눈에 조망한다. 목판화 <통곡 1>(1988), 고무판화 <드르에서 거적데기>(1987), <토민3>(1988) 등 1980년대 작품들은 감정을 직접 드러냈다. 반면 <70년, 위패봉안실>, <가메기 몰른 식게>(까마귀도 모르게 지내는 제사), <그럼에도 밭을 일구다>(이상 2022) 등 최근작들은 피해자 사연을 작품에 담아 아픔을 간접적으로 전했다.
박 작가는 “작년 7월 미술관 연락을 받고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 한 달에 30점 이상을 새기며 손이 퉁퉁 부었다”며 “작품을 제작할 땐 몰랐는데 전시를 열고 보니 예전 작품은 피해자들의 분노를 대신 표현했다면 요즘 작품은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경향이 보였다”고 했다.
광주시립미술관 6월18일까지
‘4·3 기억투쟁, 새김과 그림’ 전
목 없는 사람들 ‘두무인명상도’ 등
1980년대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4·3 직접 관련 없어 표현 자유로워”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지내
박 작가는 소설 <순이삼촌>의 현기영(81) 작가, <4·3 연작> 강요배(71) 화백처럼 직접 4·3사건과는 연관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4·3을 이야기하는데 자유롭다고 했다. 그는 “직계가족이 피해를 본 가정은 여전히 4·3을 입 밖에 꺼내기 어려워한다”며 “현기영 선생과 강요배 화백을 만나면 ‘우리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거로 마음의 빚을 갚자’는 말을 한다”고 했다.
1980∼90년대 ‘그림패 바람코지’, 탐라미술인협회, 제주민예총 등 진보문화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2000년 4·3특별법 제정 뒤 4·3평화기념관이 생기자 전시팀장을 맡아 문화행정으로 나섰다. 이후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소장, 제주도 문화재위원 등을 지낸 뒤 2016∼2018 (재)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을 끝으로 다시 조각칼을 들었다.
그는 “2018년 4·3 70주년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데 동의하지 못했다”며 “당시 행정가로서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이 말을 듣고 ‘4·3의 봄은 아직 멀었다’는 점을 알리려고 30년 만에 다시 판화를 했다”고 말했다. 전시 대표작 ‘두무인명상도’는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다.
“조선시대 역적으로 몰려 죽으면 가족들은 이름을 새기지 못한 백비(빈 비석)를 세워놨어요. 제주 4·3이 아직 누워있고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백비 꼴이죠. 4·3은 민간인 학살만 부각돼 있는데 무장항쟁의 수괴들도 역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지금은 목 없는 그림을 구상 중이지만 언젠간 목 있는 그림을 그릴 날이 오겠죠.”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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