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다"
[편집자주] 재계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누군가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세상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자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막았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이어졌고, 중국은 그 보복조치로 '안전보안 점검'이라는 명목으로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제재에 나섰다.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8년 중국 기업과의 특허 소송에 직면한 마이크론에 대해 판매금지조치를 내린 바 있다. 이 또한 특허 침해문제라기보다는 미국의 대중국 압박에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이 선수를 쳤고, 중국이 맞대응하자 미국이 이번에 다시 재차 응전에 나선 것이다. 문제는 그 응전의 지렛대가 한국 기업이라는 점이다. 미 행정부는 중국이 마이크론 제품의 판매금지에 나설 경우 '대체재'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제품의 중국내 공급까지 막겠다는 의지다. 이를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다.
사실 이런 패권다툼은 예견됐던 일이다. 2000년대 초반 고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이 '넛크래커(호두까기 도구)' 사이에 끼는 한국의 현실을 우려해 빠른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었다. 이 회장은 당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않으면 넛 크래커 사이에서 깨지는 호두의 꼴이 될 것이라는 점을 경고했다.
이 전 회장은 앞서 1993년 신경영을 설파할 때는 '100년'마다 돌아오는 세기말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구한말 서구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옴짝달싹 못한 대한제국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며 철저한 미래 준비를 당부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우리 기업들의 준비가 현재 '반도체 강국'이라는 작은 결실을 맺어 미국과 중국의 '넛 크래커' 안에서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그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김은숙 작가가 구한말을 배경으로 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여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의 내레이션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하다.
일본과 청나라·러시아·미국 등 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약소국민의 지난한 삶과 애환을 담은 이 한줄의 대사는 100여년 전의 역사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짐을 우리에게 알린다.
"정경(정치와 경제)분리라는 세계화의 과거 흐름은 이미 멀어졌고, '경제안보'라는 낯선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일은 어떤 두려운 격변이 올까. 그 격변의 시간을 대한민국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미국은 그동안 자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개발도상국 발전모델로 삼은 암묵적 합의인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활용하며 글로벌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자국의 턱 밑까지 쫓아온 중국의 경제력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됐고 대외정책기조를 급선회했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된 것은 이 변화에 불을 댕겼다. 세계화에 동참해 전세계로 공장을 확장했던 한국 기업들에겐 위기신호가 켜진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중국과 러시아를 축으로 한 구 공산진영의 파워게임이자 신냉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과거 포탄과 석유를 중심으로 한 군사력의 대결이었다면, 이제는 첨단 반도체와 2차 전지 등을 무기로 한 기술 헤게모니 쟁탈전이다.
일본의 자리를 미국이 대신했을 뿐 청나라의 편에 설 것인가, 일본에 기댈 것인가를 고민하던 구한말과 닮았다. 제국주의가 그랬듯 경제안보라는 이념은 무력과 경제력을 양손에 쥐고 세계를 호령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나 세계경제에는 긍정적이지 않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정부의 '나쁜 손'이 관여하면 시장이 붕괴될 수 있다. 정부가 기업활동을 좌우하는 현상이 고착화하고 경제안보가 심화하면 시장은 두개로 쪼개질 것이고 기업들의 실적도 반토막이 날 수밖에 없다. 전세계를 상대로 하던 사업이 반쪽 진영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미·중 모두도 안전하지 않다. 그 후 세계 경제의 급락은 명약관화하다.
진영논리와 무력 대결은 소모적인 갈등 비용만 높일 뿐이다. 이를 풀기 위해선 정치의 힘이 발휘돼야한다. 한미 정상회담이 양국 관계를 넘어 국제 정치 복원의 주춧돌이 되길 바란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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