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명 칼럼] 한국이 '경제 동물'처럼 보일 때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3. 4. 2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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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폭한 국가들을 상대할 때
무조건 충돌 회피엔 대가 따라
굴종의 상대는 더욱 무시하고
같은 진영 안에선 경멸 당해

일본을 '경제 동물(economic animal)'이라 야유하던 시절이 있었다. '돈 벌 줄만 알았지 이념적·보편적 가치에 둔감한 나라' 정도의 경멸을 담은 표현이었다. 근자에 일본은 그렇게 이념적으로 몰가치해 보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난민을 수용한 나라가 일본이었고 기시다 총리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응원하러 키이우에 갔다. 요사이 세계 10위권 국가 중에서 경제 동물이라는 야유를 받을 국가를 꼽으라면? 나는 큰 주저 없이 한국을 꼽겠다.

일부 진영과 그들을 대변하는 신문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9일 공개된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며 일주일째 파상 공격을 퍼붓고 있다. 윤 대통령은 두 나라가 무리하게 현상 타파에 나설 경우 평화 진영에 서겠다는 말을 완곡하게 했을 뿐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윤 대통령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 지도자로선 보기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의 최고지도자가 그 정도 말을 한다고 해서 저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설혹 중·러가 반발한다손 자기네 지도자부터 욕하는 국민도 없다.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라는 보편 가치에 입각해 말하는 것은 자유 진영 지도자가 늘 하는 일이고 의무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은 뒤로 흥정도 할 것이다. 오른손으로는 주먹을 겨루고, 왼손으로는 악수를 청하는 것이 정상(normal) 국가의 외교다.

한국은 오랫동안 그런 외교를 해오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사는 데 바빠서도 아니고 힘이 약해서도 아니며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너무 첨예해서도 아니다. 가난하지만 할 말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진짜 이유는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몰가치하고 나약한 근성의 경제 동물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21세기 이후 우리는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미·일과는 때로 티격태격하고 자존심을 실리에 앞세우기도 했으나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는 그러지 못했다. 중·러가 미·일보다 난폭한 국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점잖은 사람을 얕보고 깡패에 굽신거리는 것은 몰가치한 인격의 특성이다. 국가에도 그런 격은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국은 중·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퍽 공순하게 굴었지만 저들의 전투기는 수시로 독도 상공을 넘나들며 그 선의를 희롱했다. 우리의 독도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위협한 것은 중·러였지 일본이 아니었다. 중국의 사드 무역 보복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윤 대통령 발언으로 우리 국가 이익이 크게 침탈될 것처럼 겁을 주지만 이익은 몸을 사릴 때도 침탈되곤 했다.

중·러가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한국을 만만히 보기 때문이다. 중·러의 눈에 한국은 입바른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나라이고 자신들과 대거리하는 시늉도 해서는 안 되는 나라다. 거기에 무슨 논리는 없다. 그들이 무례하게 굴어도 우리가 대응하지 않고, 한마디 해야 할 때 못 본 척하는 일이 오랜 세월 쌓이면서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 결과 한국 대통령의 도덕책 같은 한마디에도 '너희가 감히' 하고 나온다. 습관적 저자세가 우리의 국제 공간을 좁혀 버렸다.

시대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미국의 리더십 아래 모든 나라가 그럭저럭 이해를 맞춰가며 지내던 탈냉전의 시대는 저무는 중이다. 몰가치·몰이념의 시대에서 다시 가치·이념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보다 가치의 색채를 더하면 중·러는 이를 현상 파괴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소란이 두려워 계속 회색지대에 머물면 정상 국가로 행세하기 어려워진다. 중·러로부터는 체급을 인정받지 못한 채 무시당하고 자유 진영으로부터는 '경제 동물' 취급을 받게 된다. 그걸 국가 이익이라 여긴다면 그 또한 한국의 선택이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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