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민주주의 아버지가 타국서 숨진 까닭은… 쁘리디 파놈용
타이(태국) 배낭여행객들의 천국이라는 카오산로드를 나와 짜오프라야강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탐마삿대학 후문이 나온다. 강변으로 난 학생식당을 지나 올라가면 노란색 건물에 중세시대 유럽의 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탑처럼 하늘로 치솟은 지붕이 보인다. 그 바로 앞에 가운을 입고 앉은 동상이 있다. 1934년 탐마삿대학을 세운 초대 총장 쁘리디 파놈용(1900~1983)의 동상이다.
수십 년간 이어진 군부독재로 가려졌지만 타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입헌민주주의제도를 도입한 명실상부한 민주주의국가다. 1932년 6월24일 군부세력과 법률가, 그리고 민간인이 주도해 일어난 ‘인민당’ 혁명은 짜끄리 왕조의 절대왕정을 종식하고 입헌군주제와 함께 내각제를 도입하는 변화를 낳았다. 이 인민당 혁명의 주역이 바로 법학자이자 정치가, 그리고 사회운동가이던 쁘리디 파놈용이다. ‘타이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한 그의 삶은 타이의 민주주의 역사가 군부독재에 가려진 것처럼 왕의 암살에 연루됐다는 오명 때문에 역사에서 지워졌다가 최근 타이의 어린 학생들이 주도하는 민주화운동이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재조명됐다.
2020년 4월, 1932년 혁명을 기념한 동판이 갑자기 사라지자 언론과 민주화운동가들은 쁘라윳 짠오차 정부가 의도적으로 민주화의 상징물들을 없앤다고 비판했다. 그해 6월24일 열린 인민당 혁명 88주년 기념행사에 엠제트(MZ)세대 민주화운동가 100여 명이 모여 인민당 혁명 선언을 읽고 타이에 민주주의 시대를 연 쁘리디 파놈용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선언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들은 인민당 혁명 이후 88년 만에 처음으로 왕실 개혁을 요구한다.
입헌민주주의 꿈꾸던 청년, 1917~1932년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쁘리디는 고등학교 과정을 14살에 모두 마친 수재였다.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지 않아 2년 정도 아버지를 도와 농사짓다가 17살이 되던 해 방콕에 있는 사법부가 운영하는 로스쿨에 입학한다. 1919년 변호사 시험에 최종 합격하지만, 여전히 나이가 어려 만 20살이 되어서야 변호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1920년 사법부 장학생으로 발탁돼 프랑스로 법학 공부를 하러 떠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보인다. 1924년 캉대학에서 법학학사 학위를 받자마자 파리정치대학에 진학해 법과 정치경제를 전공하고, 1926년 법학박사 학위와 정치경제대학원 졸업증을 받는다.
파리에서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부 시절에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서 유학하던 학생들과 시암(1939년 이전 타이의 국명) 지식인 협회를 세워 조국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이런 모임에서 절대군주제의 비합리성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입헌군주제에 대한 희망이 공유됐다. 훗날 인민당 창립 총회라고 할 만한 첫 번째 모임이 쁘리디와 미래의 정치적 라이벌이 될 피분 송크람을 포함한 7명의 유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1926년 2월 파리에서 열린다. 이 모임에서 이후 1932년 인민당이 절대왕정을 쿠데타로 무너뜨리며 발표한 독립, 평화와 질서, 경제, 평등, 자유 그리고 교육 보장이라는 6개 원칙이 만들어진다.
쁘리디는 귀국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법부 소속 판사가 됐고, 사법부 소속 로스쿨 강사로도 활동했다. 바쁜 와중에도 쁘리디는 방콕 중심지에 법대생을 위한 무료 법률 교육 과정을 열고, 직접 인쇄소를 운영해 법률 관련 문서와 책을 출판하면서 자신처럼 변호사와 판사가 되기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에게 기회의 폭을 넓혀줬다. 그렇게 평범하던 법학자의 삶은 1932년 6월24일 일어난 인민당 혁명으로 급격히 바뀐다.
혁명 열기를 개혁 동력으로, 1932~1947년
인민당 혁명이 성공한 뒤 쁘리디는 새 내각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됐고, 곧 인민당 하원의원 대표로 선출돼 제헌위원회에 들어갔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는 임시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시암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기본 원칙과 삼권분립 원칙을 세운 1932년 임시헌법이 그해 12월10일 라마 7세 쁘라차티뽁 왕에 의해 공표된 것은 타이 민주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헌법 공표 뒤 하원에서 선출된 15명의 인민위원회 위원이 된 쁘리디에게 주어진 임무는 인민당이 약속한 국가 경제계획 수립이었다. 절대왕정제가 폐지된 만큼, 봉건적인 지주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암 경제 구조의 전근대성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위해 쁘리디가 제시한 경제개혁안 안에는 토지 국유화, 국립은행 설치, 공공고용 확대, 사회보장제도 강화 등이 포함됐다. 다수의 인민당 의원이 찬성했지만 몇몇 지도자가 반발하며 쁘리디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결국 1933년 12월 쁘리디의 사상 검증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쁘리디는 소환된다. 심문을 맡은 법학자가 쁘리디에게 1933년에 쓴 국가 경제계획 개요안 내용을 물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서 구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맞서고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부르주아지와 영원히 싸울 것인가?” 쁘리디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어떤 형태의 독재도 싫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뿐 아니라 어떤 계급의 독재도 싫다.” 위원회는 쁘리디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발표한다.
1934년부터 쁘리디는 다양한 정부 관료직을 거치며 인민당이 초기에 세운 6개 원칙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1934년 3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뒤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고 지방 관료도 선출제로 바꾼다. 1933년 만든 새로운 지방행정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에 공공사업부를 설치하고 병원을 짓고, 농부들을 위한 보를 만드는 사업 등을 시행한다.
1936년에는 외교부 장관으로 활약했다. 약 2년간의 재임 동안 쁘리디가 가장 집중한 과제이자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짜끄리 왕조가 유럽·미국·일본 등과 맺은 불평등조약 취소였다. 쁘리디는 협상과 설득을 통해 12개국이 시암에서 누리던 치외법권과 무역 특혜를 철회시켰다. 1938~1941년 재무부 장관으로서 왕실에 내던 직접세를 다수 폐지하고 상위 소득계층에 부가세를 부여해 이전 왕들이 탕진한 국고를 채웠다.
쁘리디가 재무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그가 처음 국가 경제계획 개요안에서 제안한 내용이 여럿 실현됐다. 사립은행을 허락하되 1940년에 국립은행을 만들어냈다. 서민과 농민을 괴롭히던 과다한 세금을 없앴지만, 한편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국내외 상황에 대처하며 환율 차이를 이용한 투자나 환금작물의 독점, 부가가치세 부과 등으로 내실을 챙겼다. 7년여의 화려한 정치 경력은 1941년부터 본격화한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다시 시대의 역풍을 맞는다.
짜끄리 왕조의 섭정에서 망명자로, 1941~1949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1940년 베트남에 진출한 일본은 피분 송크람에게 접근해 일본이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등지로 확장해나갈 거점 지역으로 타이 영토를 쓸 수 있게 해준다면 과거 서구 제국에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찾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피분은 1942년 1월25일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 전체에 전쟁을 선포한다. 쁘리디는 자유타이(세리타이)라는 지하조직을 주도해 파시스트적 피분 정권에 대한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4년 7월 피분은 사임한다.일본이 타이 영토 사용권을 얻기 위해 피분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인물이 바로 쁘리디였다. 이에 1941년 말 피분은 쁘리디에게 1935년 퇴위한 쁘라차티뽁 왕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아난다 마히돈 왕의 섭정을 맡긴다. 1946년 6월 아난다 왕이 침실에서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됐을 때 쁘리디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아난다 왕의 죽음은 ‘사고’였지만, 군부는 1947년 왕의 죽음을 핑계로 쿠데타를 단행한다. 곧 피분이 다시 총리직을 거머쥐면서 쁘리디는 위협을 느껴 타이를 잠시 떠난다. 1949년 2월26일 자유타이 세력과 공조해 군부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그의 민주화 혁명은 쓰디쓴 실패를 맛본다.
망명자의 삶 그리고 뒤늦게 찾은 영광, 1950년~현재
쁘리디가 개인적, 사상적 그리고 현실적 이유로 선택한 망명지 중국은 오히려 그가 애초 호찌민과 다름없는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줬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쁘리디는 타이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고, 1970년에는 자신에게 철학·사상적 고향이던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1983년, 쁘리디는 제2의 고향 파리에서 숨을 거둔다.
1934년 쁘리디가 건립을 제안한 탐마삿대학이 문을 연 순간부터 18년 동안, 그는 이 대학의 총장을 맡았다. 탐마삿대학 후문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탐마삿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탐마삿은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탐마삿대학을 통해 쁘리디가 이루고 싶었던 목표는 바로 민주주의, 특히 서민을 위한 민주주의의 전파였다. 이는 지금까지도 탐마삿대학의 기본 정신으로 남았고, 그 탐마삿대학의 학생들은 타이의 민주화를 위해 오늘도 싸우고 있다.
현시내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키워드 동남아>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 등을 펴낸 서강대 동아연구소가 새겨볼 인물을 키워드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살펴보는 칼럼입니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