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임대인 신상 직접 공개"…전세사기 기승에 '사적제재'까지 등장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최근 전세사기 피해가 전국적인 쟁점이 되고 있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로는 피해 구제가 어렵다는 원성이 자자한 가운데, '사적 제재' 수단이 등장해 주목된다.
25일 나쁜 임대인을 뜻하는 영단어 조합으로 주소를 만든 '나쁜 집주인' 홈페이지에는 집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 명단이 올라와 있다. 명단에는, 적게는 1995년생부터 많게는 1972년생에 이르는 연령의 남성 및 여성 사진과 생년월일 및 주소지 등 신상 정보가 공개돼 있다.
이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을 조직화할 전세사기 피해자 모임 온라인 카페와 카카오톡 단체채팅방 주소 링크, 전세사기를 피하는 법, 관련 언론기사 등을 공유하며 사기 제보도 받고 있다. 피해자 및 임차인 사이의 정보 공유 창구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는 '나쁜 집주인을 공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전세금은 세입자의 전재산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돌려주지 않기 위해 위장이혼을 하고 계약당일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신탁부동산임을 속이는 등의 방법으로 전세금을 주지 않는 사기꾼이 너무 많다"고 운영 취지를 밝히고 있다.
운영자는 그러면서 "세입자가 평생 피땀 흘려 번 돈을 갈취하고도 벌금형 정도의 가벼운 처벌로 죗값을 치르고 갈취한 돈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나쁜 집주인을 고발한다"고 지적했다.
◇공권력·사법 절차로 처벌·피해 구제 어려울 때 성행
사적 제재는 공권력이나 사법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이나 사적 단체가 범죄자에게 직접 벌을 주는 행위다. 정당방위 의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 등으로 법적 처벌을 받을 소지가 있다.
신상 공개 사적 제재 관련해 화제가 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몇 년 전 다크웹에서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한 손정우와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 조주빈을 비롯해 성착취물 제작·유포·공유범 등 성범죄자 신상을 공개한 '디지털교도소'가 있다.
다만 디지털교도소는 운영 초반 높은 사회적 관심 속 사실과 다른 허위 신상 공개로 애꿎은 피해자를 낳으며 논란이 됐고, 결국 운영자가 n번방 운영에도 관여한 마약사범이었던 사실이 밝혀진 뒤 징역 4년을 확정 선고받은 바 있다.
사적 제재는 공권력이나 사법 절차를 통해 제대로 된 처벌이나 피해구제를 기대하기 어려울 때 위법을 무릅쓰고라도 행할 욕망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조건 법치 위반 틀만 씌우고 보기도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양육비 미지급 부모 신상을 공개한 '배드파더스' 사이트가 이 같은 취지다. 배드파더스는 정부의 양육비 이행법 개정과 미지급자 신상공개 이후 활동을 중단한 뒤, 이행이 미진하자 지난해 다시 문을 열었다.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본창씨는 2020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공익적 취지를 인정받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듬해 2심에서 벌금 10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구씨 처벌 여부가 사회적 논란으로 번진 가운데 대법원 판단은 1년 넘게 지연되고 있다.
전세사기와 관련해 등장한 이번 사적 제재 형태의 신상공개 역시 법적 처벌 여부가 사회적 논란으로 번질 공산도 있다.
다만 부동산 문제 관련 전문적으로 활동 중인 김예림 법무법인 심목 변호사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만 공익성이 있으면 명예훼손죄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며 "허위사실 적시 없이, 악의적 신상털기가 아니라, 공공의 필요 의해 이뤄졌다는 점만 입증되면 법적 처벌을 피해갈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정쟁으로 번진 전세사기…"정부 대처 미흡한 탓"
결국 악성 임대인 신상을 직접 공개하는 사적 제재는 현재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를 비롯해 정부가 마련 및 발표 중인 대책이 제대로 된 제재나 피해 구제 역할을 하긴 역부족이란 지적 속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부가 제출한 악성 임대인 공개법이 지난 2월 국회를 통과해 올 하반기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최근 3년 내 2회 이상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임대인 중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대신 갚아준 채무가 2억원 이상인 경우' 등에 한정해 개별 피해자에겐 개선책으로 와닿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여론의 높은 관심 속 의제가 정쟁으로 비화할 조짐도 보인다.
전세사기 문제를 집중 제기해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김남근 법무법인 위민 변호사는 "사적제재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지금도 경제적 여건으로 위험을 안고 빌라 전세 계약 등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며 "이들에게 최소한의 안내라도 해줄 공공의 역할이 안 되고 있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개인정보보호법에도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정보 공개를 할 수 있다고 돼 있는 만큼 심의위원회를 거쳐서 공공이 신속하게 안내해주는 게 바람직하다"면서 "사적 제재는 잘못된 정보 등 피해 발생 우려도 높기 때문에 공공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익을 위한 악성 임대인 정보 공개 외에도 처벌과 피해 구제 대책에 있어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임대인이 처음부터 보증금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는 걸 검사가 입증해야 사기죄를 적용할 수 있고, 지금 정부가 얘기하는 '임차인 우선매수권 신속 진행'도 결국 경매 가능한 집에나 해당하는 등 제한적 피해 사례가 많다"면서 "현실에선 다급한 사람이 많은 만큼 정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피해 유형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맞춤형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이 지시한 경매 중단은,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피해자들처럼 세입자의 확정일자 시행 전 금융기관 대출이 이뤄져 근저당권이 설정된 경우 세입자가 당장 집에서 내몰리는 사태를 지연시킬 수는 있다. 다만 이 경우도 경매가 중단되는 6개월내 실효적 구제책이 시행돼야 한다.
반면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왕' 피해자들은 임대인의 체납 세금 문제로 경매를 열지 못해 국세청 등 범정부적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 밖에도 경기 화성시와 구리시, 부산, 광주 등 전국에서 다양한 피해 사례가 속출해 대책 부실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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