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권도 이러지 않았다”…전문가·피해자지원단체 윤 대통령 발언 일제히 비판

김세훈 기자 2023. 4. 2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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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배상 해법·대일 굴욕외교도
일회성 사고 아닌 ‘그릇된 인식’ 문제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현지 시간) 워시턴DC의 한 호텔에서 열린 워싱턴 동포 초청 만찬 간담회에 참석해 격러사를 하고 있다. 2023. 4. 15.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경향신문 김창길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외신 인터뷰에서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은 못 받아들인다”고 말한 것을 두고 학계 전문가와 강제동원·위안부 피해지원단체가 “왜곡된 역사인식”이라며 비판을 쏟아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징용) 배상 해법으로 제시한 ‘3자 배상안’을 비롯해 올해 들어 정부가 보인 일련의 대일 굴욕외교가 단순한 ‘일회성’ 사고가 아니라 윤 대통령의 그릇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문제임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런 역사인식이 ‘독도 영유권 주장’ ‘위안부 문제’ 등에서 역사왜곡을 일삼는 일본에 면죄부를 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25일 통화에서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치 문제가 다 끝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라며 “과거 보수 정권인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식민지배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입장은 확실하게 보였다. 이번 정부는 그러한 인식조차 공유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남 교수는 “외교는 국가 정체성과 그것을 지지하는 국민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발언을 계속 내놓는다면 일본뿐 아니라 다른 국가와의 외교에서도 힘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윤재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 문제는 (정부가) 덮는다고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과거 위안부 문제가 50여년간 묻혀있다가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공론화된 것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

이어 “3·1절 기념사 등을 보면 윤 대통령이 좌우대립을 극명하게 나누는 ‘냉전적 사고’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냉전 이후 세계가 다양화됐고 보다 유연한 자세가 요구되는데 대통령의 인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피해자들을 향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소장은 “3.1절 기념사와 외신 인터뷰 발언 등을 보면 윤 대통령은 ‘힘에 의한 지배’라는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은 식민사관·군국주의사관과도 연결된다”며 “이러한 인식으로는 일본에 식민지배 가해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되려 피해자들에게 ‘식민지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약해서 당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지원단체들도 “피해자를 짓밟고 가겠다는 것”이라며 윤 대통령 발언을 비판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이날 성명에서 “일본은 광복 78년이 지난 지금까지 피해자들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고, 주권국인 한국의 판결을 존중해 조속히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하는 것은 국민의 상식”이라며 “(윤 대통령 발언은) 대한민국 대통령보다는 일본 총리가 더 어울릴법한 망언”이라고 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통화에서 “피해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외국언론을 상대로 자국 국민을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보니 참담하다”고 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을 힘의 논리로 무릎 꿇리려는 게 아니라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있는 행동을 하라고 촉구한 것”이라며 “대통령 발언은 역사정의를 되찾으려던 피해자와 피해자지원단체를 짓밟고 가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해 온 시민단체 평화나비네트워크는 이날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을 규탄하는 1인 시위를 가졌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날 성명에서 “국민의 눈높이와 동떨어진 대통령의 무지하고 일방적 인식이야말로 한·일관계 개선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식민사관에 경도된 대통령은 사과하고 외교·안보라인을 즉각 경질하라”고 했다. 이어 “과거사 반성이 없는 일본과의 협력을 위해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 일방적 용서를 강요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했다.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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