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고령층·여성 취업자 늘면서 노동시장 긴장 완화…인플레 압력 낮아질 것”
美와 달리 노동시장 덜 타이트한 韓
은퇴한 베이비부머 취업 등 영향
‘고용의 질’은 낮아…경제 영향 제한적
“노동시장 경직도 낮아지면 물가 하락”
한국은행은 올해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이 늘면서 노동시장 긴장도(tightness)가 낮아질 것라고 전망했다. 노동시장 긴장도는 실업자 1명당 빈 일자리 수를 나타내는 지표로, 시장 내 노동 수급 상황을 나타낸다. 긴장도가 높다는 것은 일자리를 찾는 사람보다 현재 비어 있거나 1개월 안에 새로 채용될 수 있는 일자리보다 많다는 의미다. 반대의 경우에는 노동시장 긴장도가 낮다(덜 타이트하다)고 표현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령층과 여성 중심으로 노동 공급이 늘면서 노동시장 긴장도가 완화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 결과 물가 상승 압력도 낮아질 것이라고 한국은행은 내다봤다.
◇ 고령층·여성 취업 증가에 韓 노동시장 긴장도, 팬데믹 이전과 동일
서영경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위원은 25일 서울 중국 한은 본부에서 열린 ‘노동시장 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노동시장 상황과 인플레이션 압력’을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한은과 경제학자들은 국내외 노동시장의 변화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 위원은 “최근 주요국의 통화정책 차별화는 노동시장 상황 차이와 이에 따른 물가압력 차별화에도 일부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올해 중 고용시장에서는 수요 둔화와 공급 확대가 맞물리면서 긴장도가 완화되고, 이는 물가 압력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시장 긴장도는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전과 같은 수준인 0.34를 기록 중이다. 팬데믹 이후 일자리가 급격히 늘어나 노동시장 과열이 나타난 미국과는 대조되는 흐름이다. 미국의 노동 긴장도는 팬데믹 이전(2014~2019년) 0.86에서 팬데믹 이후(2021년~지난 2월) 1.57로 높아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취업자 수, 고용률, 경제활동참가율, 실업률 등 노동시장 양적 지표는 팬데믹 이전 수준을 크게 웃돌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긴장도가 낮게 유지됐다. 한국은행은 그 이유로 고령층과 여성을 중심으로 일하려는 사람이 많아진 점을 꼽았다. 베이비부머 세대(1946~1959년)의 은퇴로 고령층 고용이 증가한 가운데 만혼·저출산에 가사노동의 시장화로 여성 고용이 늘었기 때문이다.
고령층과 여성 노동 공급이 비정규직 등 ‘불완전 고용’을 위주로 증가하면서 총 근로시간이 감소한 점도 노동시장 긴장도 완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서 위원은 평가했다.
다만 서 위원은 고용의 양적 증가에 불구하고 고용의 질이 개선되지 않은 탓에 이런 노동시장의 변화에 성장률 등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봤다. 서 위원은 “우리나라는 미국과 비교하여 성장과 취업자간 상관관계가 낮고, 미국과 달리 팬데믹 이후 노동생산성이 하락했다”고 했다.
실제 국내총생산(GDP)과 취업자간 상관계수는 지난 2010~2022년 기준 한국이 0.52로 미국(0.9)과 유럽연합(0.7%)에 비해 낮았다. GDP 대비 취업자수로 나타내는 노동생산성도 한국은 2011~2019년 기준 2.5%에서 2020~2022년 1.7%로 낮아진 반면, 미국은 같은 기간 0.4%에서 1.3%로 높아졌다.
서 위원은 “고용의 전통적인 양적 지표와 물가간 직접적인 관계는 높지 않지만, 고용시장 긴장도와 근원물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 상승률이 높게 유지되면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가 더뎌지기 때문에 한국은행에서는 근원물가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시장 경직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면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우리나라 노동시장 경직도와 근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0월을 기점으로 동반 하락 중이다.
나아가 서 위원은 “노동생산성 하락이 지속될 경우 저성장·저물가 체제로 회귀가 불가피하고 통화정책적 부담도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서 위원은 연내 피벗(pivot·통화정책 전환) 가능성엔 선을 그었다. 그는 “고용 측면에서 물가 압력은 완화됐지만 기대인플레이션이나 수입물가, 환율 등이 다른 요인이 영향을 미치고 있어 추이를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 이 총재 “노동시장-인플레 관계 확인해야 의미있는 통화정책 수립”
‘물가 안정’이 최우선 정책 목표인 한국은행이 노동시장에 중점을 둔 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국내에서 코로나 전후 노동시장의 변화와 통화정책적 의미를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한 미국이 견조한 노동시장을 근거로 추가 긴축을 시사하는 등의 행보를 이어가자, 한국은행도 노동시장이 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환영사에서 “세계 각국에서 노동시장과 인플레이션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이런 관계를 확인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팬데믹 이후 국내외 노동시장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글로벌 공통적인 요인도 있지만 각국의 상이한 노동시장 여건으로 인한 노동시장 변화와 물가에 대한 영향이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고 (이런 변화가) 일시적인 구조적인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노동시장은 고용과 성장, 물가 등 거시경제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소득분배와 인적자본 형성 등을 통해 개인의 삶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주제”라며 “특히 우리나라는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노동시장의 구조변화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고령화 등 노동시장 구조가 경제정책에 미치는 영향,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거시경제적 통화정책을 수립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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