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65>] 많은 사람과 거리감 제로의 상태로 붙어 서 있는 그 순간

박혜진 문학평론가 2023. 4. 2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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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노견과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친구는 안 본 사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식도염을 앓았다는데 그 와중에도 술을 끊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여전하다 싶었다. 다리가 아픈 강아지는 여전히 불편한 몸이었지만 여느 때와 같이 느긋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고 자연스러운 와중에 한 가지 어색한 게 있다면 강아지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동네 할머니가 직접 짜 준 스웨터라고 하기엔,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작고 답답해 보였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왜 이렇게 작은 옷을 입혀 놓은 거야? 조금은 놀려 줄 기세로 물었다가 대답을 듣고 바로 숙연해지고 말았다. 불안해할 때는 이렇게 딱 맞게 입혀서 몸을 조여 주면 강아지가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내 눈에는 그저 느긋해 보이는 강아지였지만 주인만 아는 불안감이 있을 터였다. 꽉 끼는 스웨터는 친구가 두 팔로 안아 줄 수 없을 때 그 역할을 대신해 주는 팔이고 품이었다. 작은 옷을 놀릴 생각만 했던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불안할 때 물리적인 압박을 받으면 오히려 진정되는 효과를 본다는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그럴듯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나야말로 몸보다 작은 옷을 입은 강아지처럼 외부로부터의 압박에서 편안함을 경험하고 있던 차였다. 한 달 전 퇴근길, 발 디딜 틈 없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무념무상으로 이동하던 순간, 다닥다닥 붙어 선 거리 없음에서 전에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 많은 사람과 거리감 제로의 상태로 붙어 서 있는 그 순간, 대부분의 날에 압박감이자 스트레스의 원흉이었던 조건이 그날 그 순간만큼은 안정과 평화로 이해되었다. 그 무렵 나는 백수린의 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감’에 깊은 환멸을 느끼던 중이었다.

백수린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는 여러 관계가 등장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 가는 관계가 다양하면서도 섬세하게 변주되는 것이 특징이다. 멀어질 때 관계는 어디에서부터 균열이 나는지, 그 미세한 균열은 어떻게 파괴에 이르는지, 혹은 파괴되었지만 부서지지 않은 채 기만적인 모습을 유지하는지. 핵심은, 관계 맺을 때 우리가 타인과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한편 절대 좁히지 않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데에 있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일수록 우리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쉽게 도망갈 수 있도록, 도망갈 때 많이 다치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거리감을 채우는 건 언제나 불안일 수밖에 없다. 해소되지 않는 불안으로 관계는 모래성처럼 위태로워진다. 더 가까워질 수 없을까. 몸에 좀 작은 스웨터가 되어 줄 수는 없을까. 지나치게 서로를 조심하고, 지나치게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 이면에는 자신을 향한 지나친 보호가 있다. 하지만 그 보호는 힘이 없다. 대체로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한다.

오늘의 마지막 문장은 백수린의 단편소설 ‘폭설’의 엔딩 장면이다. ‘나’는 엄마와 여행 중에 폭설을 만난다. 인적 드문 곳에서 압도적인 폭설에 갇혀 가도 오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나’는 잠재되어 있던 감정을 분출하고 만다.

어릴 적 자신과 아빠를 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고 떠나 버린 엄마를 향한 비난의 말들이자 존중의 이름으로 거리감을 지키느라 한 번도 표출하지 않았던 진심의 표현들이다. 마지막 문장은 폭설이 물러가고 밖으로 나왔을 때, 딸의 공격에 말을 잃은 엄마가 가장 먼저 건넨 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맥락을 아는 우리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기에 처했을 때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말에는,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쉽게, 타인을 해치는 존재가 되는지가 전제되어 있다. 딸이 방금 자신에게 그런 것처럼, 수년 전 자신이 딸에게 그런 것처럼.

불안할 때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을 불안에 빠뜨린다.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나’의 불안은 모두의 불안이 되고, 모두의 불행 속에서 나의 불행은 상쇄된 듯한 효과가 나타난다. 그럼, 이제 나의 불안은 사라졌다고 봐도 되는 걸까. 이 소설의 끝은 타인과 멀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를 거울처럼 되비춘다. 불안은 타인을 해침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거리를 없앨 때 사라진다는 것을. 불안은 때로 거리감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Plus Point
백수린

사진 조선일보 DB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이 있다.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관계의 이면을 정교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하는 작품들로 평단과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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