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사태 후 美 은행주에 베팅한 간 큰 서학개미] “은행 위기 지속 안 한다” 판단에 3000억원 몰려
서학개미(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국내 투자자)들이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이후 한 달 동안 미국 은행 관련 주식과 상장주식펀드(ETF), 상장지수증권(ETN) 등에 3000억원이 넘는 돈을 베팅한 것으로 나타났다.
SVB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급격한 긴축 영향으로 3월 10일(이하 현지시각)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산했다. 이번 사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상업은행 파산이다. SVB는 1983년 캘리포니아주에 설립된 미국 내 16위 은행으로 신생 스타트업의 자금원 역할을 해왔다.
SVB는 스타트업들이 맡긴 예금으로 미국 장기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에 투자했다. 미국 연준의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돈줄이 마르자 기업들이 예치금을 인출해가면서 자금 압박이 커졌다. SVB는 돌려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 자산을 매각했지만, 고금리로 국채 가격이 하락(국채 금리 상승)한 만큼 큰 손실을 봤다. 이후 손실 보전을 위해 시도한 유상증자가 실패하자 뱅크런이 촉발돼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SVB 파산에 이어 167년의 역사를 가진 스위스 2위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CS)가 스위스 최대 금융기관 UBS에 인수되는 등 은행 위기가 확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CS는 2021년부터 ‘영국 그린실 스캔들’과 ‘미국 아케고스 사태’가 잇따라 터지며 IB의 핵심인 신용에 치명상을 입었고, 최대 주주인 사우디 국립은행이 추가 자금 투입을 중단하면서 무너졌다.
은행주 순매수 대상 상위로
이처럼 연이은 은행 위기에도 은행주 베팅액이 3000억원에 이른 것은 투자자들이 은행주 주가가 과도하게 떨어졌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4월 12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서학개미들은 SVB 사태가 발생한 3월 10일부터 4월 6일까지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을 1억263만달러(약 1344억원) 순매수했다. 이는 서학개미들의 인기 종목인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 순매수 금액(약 423억원)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이다.
서학개미들은 세 배 레버리지(차입) 상품에도 베팅하며 과감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 주요 은행 10곳을 주가 수익률 세 배로 추종하는 ETN인 ‘BMO MICROSECTORS US BIG BANKS INDEX 3X LEVERAGED ETN’을 635억원어치 사들였고, 러셀 1000 금융 서비스 지수를 세 배로 추종하는 ‘DIREXION DAILY FINANCIAL BULL 3X SHS ETF’를 179억원, 다우존스 지역은행 지수를 세 배로 추종하는 ‘DIREXION DAILY REGIONAL BANKS BULL 3X SHS ETF’를 174억원 순매수했다.
이 밖에 개별 종목으로는 뱅크오브아메리카와 팩웨스트뱅코프를 각각 360억원, 167억원 넘게 사들였다. 미국 지방은행을 묶어 놓은 ‘SPDR SP REGIONAL BANKING ETF’ 역시 89억원어치 담았다.
SVB 사태 직전까지 한 달간 서학개미들은 만기 20년 이상 미국 국채 수익률을 세 배로 추종하는 ‘DIREXION DAILY 20+ YEAR TREASURY BULL 3X SHS ETF’를 가장 많이 사들였다. 하지만 사태 직후 한 달간 해당 ETF 순매수 순위는 4위로 밀려났다.
나스닥 지수를 세 배로 추종하는 ‘PROSHARES ULTRAPRO QQQ ETF’도 2위에서 50위권 밖으로 사라졌다. 순매수 3위와 4위를 기록했던 구글 모회사 알파벳과 반도체 지수 세 배 레버리지 ‘DIREXION DAILY SEMICONDUCTORS BULL 3X SHS ETF’ 역시 5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순매수 상위 5위에 머물렀던 미국 배당주에 투자하는 ‘SCHWAB US DIVIDEND EQUITY ETF’ 역시 15위까지 내려갔다.
당국의 전격 조치에 ‘위기 확산 않을 것’에 베팅
서학개미들이 미국 은행주 관련 상품에 몰려든 이유는 SVB 사태로 촉발된 은행 위기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미국 정부는 SVB 사태 이틀 뒤 고객이 맡긴 돈을 예금보호 한도(계좌당 25만달러)와 상관없이 전액 보증하고 자금이 부족한 금융기관에 국채 등을 담보로 1년간 유동성을 제공하기로 했다. 은행 보유 자산의 시가가 아닌 장부가를 기준으로 담보 가치를 인정해 SVB처럼 손실을 감수하며 자산을 팔지 않고도 자금을 수혈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미 재무부와 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이런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사태가 2008년 금융위기 같은 시스템 위기로는 번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 정부가 이번 사태가 시스템 위기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즉시 조치에 나섰기 때문이다. 유동성 위기로 파산 위기에 빠졌던 CS 역시 UBS에 인수되며 위기가 일단락됐다.
서학개미들의 베팅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3월 21일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지역 중소은행들의 위기 사태가 다시 악화하면 추가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나서면서 미국 은행주 주가는 급등했다.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은 하루 만에 29.47% 폭등했고, 팩웨스트뱅코프와 뱅크오브아메리카 역시 같은 날 각각 18.77%, 3.03% 상승했다. 다만 이튿날 옐런 장관이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FDIC가 은행 예금 전액을 보장하도록 예금보험을 확대하는 방안은 현재 재무부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히면서 은행주는 상승 폭의 대부분을 반납했다.
SVB 사태 직후 첫 거래일인 3월 13일부터 4월 11일까지 퍼스트리퍼블릭은행 주가는 54.7% 하락했지만, 팩웨스트뱅코프 주가는 5.53% 상승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주가는 0.7% 오르는 데 그쳤다.
“은행주 변동성 당분간 지속”
증권가에서는 금융 불안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만큼 은행주를 중심으로 변동성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인식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변동성에 대한 우려감이 여전히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이라며 “미국 지방은행과 관련해 높은 변동성을 띠는 구간인 만큼 리스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UBS가 CS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CS의 AT1 채권이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면서 채권시장 불안이 남아있다는 평가다. 앞서 스위스 금융감독청(FINMA)은 170억달러(약 22조3839억원) 규모의 CS AT1 채권을 상각 처리하기로 했다. 이후 도이체방크와 바클레이스, UBS, HSBC 등 주요 유럽 은행들의 AT1 채권 가격이 함께 떨어졌다.
AT1은 코코본드(조건부 전환 사채)의 일종이다. 코코본드는 채권의 일종인데 파산이나 이에 걸맞은 위험이 닥쳤을 때 원금을 상각하거나 주식으로 바뀐다. 은행이 심각한 위기를 겪을 때 채권자들에게 원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채권인 셈이다. 이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지만 원금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은행 입장에선 이자를 제공해야 하는 채권이지만,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돼 코코본드를 발행하면 자기자본비율이 높아지는 이점이 있다.
이번 결정으로 채권자가 주주보다 우선이라는 시장 믿음이 깨지면서 ‘본드런’ 우려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골드만삭스는 “코코본드 수요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조병현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CS 코코본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 은행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시중은행 가운데 코코본드 발행 비중이 높은 은행 주가는 낙폭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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