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야구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착각
● ‘생각’하고 ‘공부’한 일본
● ‘근성’만 강조한 지옥훈련
● 입버릇처럼 “나 때는…”
● 한국야구에 ‘책’ 필요해
기자 지망생 시절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에서 마련한 '팬 미팅' 자리에서 당시 '신인급' 선수였던 이대호(41·당시 롯데 자이언츠)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인 행사로 넘어가기 전 "사인을 받으려면 팬도 최소한 A4용지 정도는 가져오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하던 그는 제가 책 표지에 사인을 받으려고 하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은 '더 사이언스 오브 히팅(The Science of Hitting)'이었고 저는 이 책을 쓴 테드 윌리엄스(1918~2002) 이름 위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 타자만큼 당신을 인정한다'는 의도였지만 저는 A4 용지를 가져오지 않은 죄(?)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뇌의 식사와 같은 것이다(本を讀むという行爲は腦の食事みたいなもの)."
일본 야구 대표팀을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정상으로 이끈 구리야마 히데키(62·栗山英樹) 감독이 2015년 펴낸 책 '미테쓰자이(未徹在)'에 쓴 표현입니다. 경영학 교수이기도 한 구리야마 감독은 이 책 발간 당시 (대학을 휴직한 상태로) 일본 프로야구 니혼햄 파이터즈 감독을 맡고 있었습니다. 일본 야구계에서는 오타니 쇼헤이(28·LA 에인절스)가 '니도류(二刀流)'를 추구하는 걸 부정적으로 봤지만 구리야마 감독은 기꺼이 길을 열어줬습니다. 오타니 역시 고교 시절 그 유명한 '목표 달성 용지'를 쓰면서 '책 읽기'를 빼놓지 않았던 선수입니다. 오타니는 미테쓰자이 출간 당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책을 잘 읽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미테쓰자이는 '아직 깨닫지 못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야구가 안 되면 방망이를 바꾸자고?
"골프가 뜻대로 안 풀리면 미국 사람은 연습을 하고, 일본 사람은 책을 읽고, 한국 사람은 채를 바꾼다."그러니 이런 골프 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한국은 야구 성적이 신통치 않을 때도 '채(방망이)부터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WBC 1라운드 탈락 이후 야구인 사이에서 가장 먼저 나온 대안이 '한국 고교야구에서도 알로이(알루미늄 합금) 방망이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고교야구는 2004년부터 나무 방망이를 쓰고 있습니다.) 프로야구 단장까지 지낸 한 야구인은 '방망이를 바꾸면 정말 한국 야구가 바뀔 거라고 믿느냐'는 질문에 "한국 야구가 더 떨어질 데가 있나"라며 "그러니 뭐가 됐든 일단 바꿔보자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15세 이하 월드컵에서는 BBCOR 인증을 받은 방망이만 사용할 수 있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은 18세 이하 월드컵부터는 나무 방망이만 쓰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15세 이하 월드컵에서는 BBCOR(Batted Ball Coefficient Of Restitution) 인증을 받으면 알로이 방망이도 쓸 수 있습니다. BBCOR에서 COR은 보통 야구 공 이야기에 나오는 '반발 계수'입니다. 그리고 BBCOR 인증을 받으려면 반발 계수가 1.05 이하여야 합니다. 1.05가 기준인 건 나무 방망이 반발 계수가 보통 이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알로이 방망이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던 이들이 학창 시절에 쓰던 '고반발 알로이 방망이'는 이제 국제대회에서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국제경쟁력을 강화하자며 알로이 방망이로 돌아가자고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이 우리 야구 인생 최고 전성기입니다."
10년 전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전을 앞두고 만난 한 투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투수 모교에는 이 선수를 빼면 믿을 만한 투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마운드에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혹사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나도 그렇고 우리 선수 대부분이 야구를 하면서 이보다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할 거다"라며 "어차피 프로에 가지도 못할 텐데 나중에 잘 던져야 하니까 지금 던지지 말라는 건 함께 땀 흘린 동료들을 버리라는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이 선수가 프로 선수가 됐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내가 우리 학교를 전국대회 4강으로 이끈 에이스였다'고 큰소리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18세 이하 야구 월드컵에서 한국은 △2015년 3위 △2017년 2위 △2019년 3위 △2022년 4위를 기록했습니다. 같은 기간 일본은 2위-3위-5위-3위였습니다.
머리를 써야 야구도 된다
"현역 시절 야구를 잘했을수록 목소리가 크게 마련이니까요."‘왜 대표팀이 야구를 못했는데 고교야구에 손을 대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에 한 야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이저리그(MLB) 감독 가운데는 현역 시절에 MLB 근처에도 못 가 본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신 '야구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 자리에 간 거다. 그런데 한국은 야구를 잘한 순서로 지도자가 되는 게 일반적이다. 본인이 잘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그리고 본인이 야구를 잘했을수록 못하는 선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종목을 막론하고 어릴 때 운동을 잘했다는 건 공부를 그만큼 멀리했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책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지도자가 한둘이 아닌데 도대체 뭘 가르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했습니다.
"느낌과 현상은 전혀 다른 얘기다."
‘공부하는 야구인'으로 유명한 박용택 KBSN 해설위원은 어린 선수들이 타격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조언을 하곤 합니다. 실제로 알렉스 로드리게스(48)나 앨버트 푸홀스(43) 같은 MLB 홈런 타자 가운데도 본인이 '다운 스윙'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동작을 분석해 보면 이 선수들 타격 자세가 살짝 '어퍼 스윙' 느낌이 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 위원 이야기처럼 느낌과 현상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도 선수가 최신 이론에 맞는 자세를 배워오면 "유튜브가 애들을 다 망쳐놨다"고 주장하는 야구인도 적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박 위원은 "과학적 접근을 부정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라."
일본 프로야구(NPB) 야쿠르트 외야수 아오키 노리치카(41)는 무라카미 무네타카(23)가 처음 팀에 입단한 2018년부터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무라카미는 지난해 56홈런을 치면서 NPB 일본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새로 쓴 타자입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MLB에서 뛰었던 아오키는 "잘 안 될 때 '멘탈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기서 생각을 멈춘 사람이다. 프로니까 왜 못 치는지, 왜 부상을 당했는지 그리고 왜 치는지도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멘탈 탓'이라고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사람이 많은데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없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야구하는 사람 다수가 물 건너온 이론이나 방법이 무슨 말인지는 알아먹으니까."
한국야구학회 관계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보수적인 일본 야구계가 미국에서 시작된 구단 운영과 트레이닝, 분석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일본은 야구 선수 대부분이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책을 읽을 줄 알기 때문에' 한국보다 빨리 변했다는 겁니다. 이 관계자는 "주말 리그나 스포츠혁신위원회 권고안이 야구를 망쳐 놨다고 믿는 야구인이 적지 않다. 그런데 수업과는 담 쌓고, 합숙 시키고, '빠다'도 치고, 감독이 마음대로 투수를 혹사시키던 20년 전에도 '기본기 타령'은 지금과 마찬가지였다"며 "프로 팀 스카우터들에게 물어보면 '코치들이 좋은 선수들 다 망쳐 놓고 우리 탓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멘탈과 근성은 동의어 아냐
"축 합격 도쿄대학 오마키 마사토"2021년 겨울 일본 하나마키하가시 고교에는 이 학교 출신 오타니의 아메리칸리그(AL) 최우수선수(MVP)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 옆에 이런 플래카드도 걸렸습니다. 역시 이 학교 야구부 출신인 오마키 마사토(大券將人)는 삼수 끝에 일본 최고 명문 도쿄대에 합격했습니다. 이 학교 사사키 히로시 감독은 "야구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야구를 잘해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일만으로 고교 생활을 보내는 건 낭비"라면서 "근육의 힘은 나이가 들면 떨어지지만 지식과 지혜는 평생 쓸 수 있다. 야구부원들에게 학업을 충실히 했는지 엄격하게 묻는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선수를 지도하는 이유는 딱 하나. "그래야 우리 학교 야구부에 아들을 넣고 싶다는 학부모가 생긴다."
"야구는 멘탈 게임이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야구를 대표하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한국 야구는 멘탈을 너무 '정신력' 그러니까 '근성'에서만 찾고 있지 않나요? 이쪽 세계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일본도 이제 △연습량의 중시가 아니라 연습질의 중시 △정신의 단련이 아니라 마음의 조화 △절대 복종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존중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지옥 훈련'에서만 답을 찾아야 합니까.
한국어에서 '○○을 책으로 배웠다'는 표현은 어떤 일을 잘 모른다고 핀잔을 줄 때 쓰는 말이지만 적어도 현재 한국에는 책이 필요합니다. 야구 팬 여러분, 정말 '타격의 과학'이라는 책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한국 야구를 맡기고 싶으십니까.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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