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에 외국계 지사장 오른 여성, ‘100년 만에 가장 맛있는 사과’ 독점[인터뷰]

2023. 4. 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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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제스프리 지사장 오른 김희정 대표, 명품 기업 제안 거절하고 창업
-H&B아시아, 15년 만에 매출 2억→840억원으로 성장
-과일 품종, IP나 마찬가지…특허 보유해야 가격 경쟁력 확보할 수 있어

-김희정 H&B아시아 대표 인터뷰



한국에서 사과가 가장 맛있는 지역은 이제 대구가 아니라 강원도다. 기후 변화의 영향이다. 기온이 상승하면서 사과 재배지가 강원도로 북상하며 지도가 바뀐 것이다. 지난해 강원도의 사과 생산량은 2만4852톤이었다. 10년 만에 17배 늘었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농산물 재배지 변화는 전 세계가 겪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품종 개발 연구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높은 기온에서 자랄 수 있는 사과 신품종을 개발했다. 인도 등 기온이 높은 나라에서도 재배가 가능한 종자다. 품종 개발은 이처럼 새로운 환경에 대비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병충해에 강한 농산물을 탄생시키기 위한 일이다. 


일본 샤인머스캣, 로열티 못 받는 이유?

전 세계가 총성 없는 종자 전쟁 중이다. 한 국가에서 신품종에 대한 특허를 내면 다른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로열티를 내고 해당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다. 심지어 수확한 종자를 다시 파종하는 것 또한 특허법으로 금지돼 있기 때문에 재배할 때마다 돈을 지불해야 한다.

종자 시장은 조용히 치열하다. 곡물 시장은 이미 종자 지식재산권(IP) 전쟁이 끝났다. 몬산토·카길(Cargill)·ADM·LDC·벙기 등 글로벌 곡물 회사가 곡물 종자에 대한 특허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농업업계에서는 IP 전쟁의 마지막 보루가 과일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샤인머스캣을 개발한 후 해외 품종 특허 출원을 하지 않다가 등록 기한을 놓쳤다. 이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샤인머스캣을 재배하더라도 일본에 사용료를 내지 않는다. 


한국 농가 250곳과 계약해 품종 수급 조절 

김희정 H&B아시아 대표는 새로운 종자를 들여오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빈다. 사과 신품종은 스페인, 블루베리는 호주, 포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들여오기 위해 어디든 날아간다.

H&B아시아는 과일 유통 회사다. 그런데 이상하게 법무팀이 발달해 있다. 전 세계 종자 개발 회사들과 판매권 계약을 하고 한국 농가와는 재배 계약을 체결한 뒤 이 둘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허·무역·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과 이어져 있다. 

H&B아시아의 대표 상품은 엔비사과다. ‘후지사과 이후 100년 만에 나온 가장 맛있는 사과’라는 평을 받는 품종이다. 엔비사과는 1985년 뉴질랜드 농업진흥청이 개발한 품종이다. 이 품종을 개발하는 데 25년이 걸렸다. 

김 대표는 이를 두고 “신품종 개발은 무식한 확률 싸움”이라며 “특히 과수 작물은 1년에 한 번 수확해야 결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이 아니라 자연 재배식으로 개발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일반 사과의 평균 당도가 12~13브릭스인데 비해 엔비사과의 당도는 15∼18브릭스로 사과 전 품종 중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과육이 단단해 상대적으로 무겁고 칼로 깎았을 때 그 부분의 색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생산성도 높다. 사과의 풍산성(꽃눈이 잘 생기고 많이 피며 열매가 많이 맺히는 작물의 성질)을 높여 꽃이 많이 피고 열매가 많이 달린다. 

김 대표는 2006년 H&B아시아를 설립하고 뉴질랜드 농업 기업인 T&G와 독점 마케팅 계약을 하고 엔비사과의 한국 재배 및 아시아 독점 유통권을 따냈다. 엔비사과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10개국에서만 재배할 수 있고 아시아에서는 H&B아시아만 재배와 유통을 관리할 수 있다. 

H&B아시아가 엔비사과를 위해 계약한 한국 농가는 250곳이다. 농가는 품질을 높이고 수확량을 늘리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수확한 사과는 모두 H&B아시아에 납품하고 유통·마케팅·판매는 H&B아시아가 한다. H&B아시아는 계약 농가에서 수확한 엔비사과를 코스트코·이마트·트레이더스·롯데마트·홈플러스 등 대형마트와 쿠팡·마켓컬리 등 온라인 유통 채널에 직접 납품하고 있다.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 이 품종의 가격을 방어하고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김 대표는 품질 유지와 수급 조절을 통한 가격 방어가 품종 특허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H&B아시아는 지난해 계약 농가에서 납품받은 사과 가운데 10%를 폐기 처분했다. ‘엔비’라는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엔비사과의 한국 시장점유율은 전체 사과 시장의 2%다. H&B아시아가 한국 사과 시장의 5%를 넘지 않도록 조절하고 있다. 한 품종이 전체 시장의 5%를 넘어서면 과잉 생산으로 인해 단가가 내려가고 계약한 농가 소득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에 제스프리 지사장…매출 30배 성장시켜



김 대표는 광고회사 AE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한때 세계 다이아몬드를 독점하던 드비어스에서 마케터로 일했다. 김 대표가 1차 산업과 만난 것은 스물아홉 살 때다. 뉴질랜드 키위 업체 제스프리가 한국 지사를 설립하던 때 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29세 1인 지사장을 맡은 김 대표는 10년간 일하며 매출을 20억원에서 600억원으로 올려 놓았다. 회사는 10년 만에 30배 성장했다. 

뉴질랜드에서 재배되는 키위 대부분이 제스프리가 개발한 품종이다. 뉴질랜드 키위 수출의 95%가 제스프리를 통해 이뤄진다. 
김 대표는 제스프리에서 일하며 과일 특허에 눈떴다.

어린 나이에 회사를 30배 성장시킨 여성 대표의 미래는 화려해 보였다. 당시 ‘외국계’, ‘여성지사장’에게 수많은 러브콜이 이어졌다. 이탈리아 명품 회사, 프랑스 주방 용품 회사 등 각종 외국계 기업에서 지사장 자리 제안이 쏟아졌다. 하지만 김 대표는 창업을 결심한다.

“그때는 창업이 눈보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쓰나미였어요.” 김대표는 창업 후 바로 후회했다. 사표 쓸 자유가 없다는 게 가장 슬펐다. 제스프리에서 10년을 일하며 쌓은 네트워크도 소용없었다. 

“창업할 때 가장 큰 적은 ‘성공의 기억’이에요. 10년간 지사장을 했으니 유통 채널 뚫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막상 창업한 후에는 대형마트 주임급을 만나기 위해 전국 매장의 과일 코너를 분석하고 메일을 넣고 수백 페이지의 보고서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했죠.” 

첫해에는 이마트에 키위 6컨테이너를 입점시킨 게 H&B아시아의 유일한 성과였다. 매출은 2006년 2억원으로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840억원을 찍었다. 15년 만에 420배 성장했다. 

김 대표는 한국 과수 농업의 미래가 IP에 있다고 말한다. 특허가 있는 신품종을 재배해야 농가에서 재배하는 품종의 가격을 방어하고 품질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H&B아시아는 계약 농가 외에도 직영 농장을 운영하며 시범 농장으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곳에서 월급 농부를 트레이닝하고 효율적인 농법을 연구해 계약 농가와 나눈다. 월급 농부가 농사를 배워 농장을 꾸릴 수 있도록 창업을 지원하는 일종의 인큐베이팅이다. 

김 대표는 “미국은 코넬대·워싱턴대 등 연구에 특화된 대학 기관이 품종 개발을 선도하고 있고 중국은 정보기술(IT) 대기업 등 자금력을 등에 업은 기업과 기관이 품종 개발에 인재와 돈을 쏟고 있다”며 “과일 수입에 그치지 않고 IP를 확보해 한국 농가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높이고 한국에서 개발한 IP를 해외 농가에 수출하는 역할을 하며 과수 산업의 부가 가치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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