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섬나라 학생 27명, 국제사법재판소에 기후위기를 묻다

주하은 기자 2023. 4. 25.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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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에 대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국제사법재판소에 묻겠다는 남태평양 섬나라 대학생들의 도전이 현실이 됐다. 이들은 기후위기가 곧 인권과 평등의 문제라고 말한다.

2019년 3월, 사우스퍼시픽 대학(USP, 남태평양 12개국 정부가 공동 운영하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4학년 학생 27명이 대담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작은 이들이 함께 들은 한 수업이었다. 이 수업에서 교수는 기후위기가 곧 인권의 문제임을 강조하며 기후위기가 사람들의 권리를 어떻게 침해하는지 가르쳤다. 27명 모두 태평양 섬나라 출신이기에 기후위기의 여파를 피부로 느끼며 자란 터였다. 이들은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단순히 지식으로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이디어가 나왔다. “전공인 법학을 살려 국제법상으로 세계 각국이 기후변화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물어보자.” 이들은 ‘기후변화와 싸우는 태평양 섬나라 학생들(PISFCC)’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세계를 상대로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러 지난 3월29일, 27명의 도전이 결실을 맺었다. 이날 유엔총회는 기후위기에 대한 권고 의견을 ICJ에 요청했다. 결의안은 ICJ에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물었다. 기후위기에 대해 각국의 국제법상 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무에 따르지 않은 국가들이 져야 하는 법적 결과는 무엇인지다. 유엔총회 표결에 앞선 연설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위기로 존립을 위협받는 국가들과 전 세계 젊은이들의 노력이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라며 PISFCC의 공로를 치켜세웠다.

4월7일, 〈시사IN〉은 솔로몬 여 PISFCC 캠페인 국장을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솔로몬제도 출신인 솔로몬 여 씨는 현재 유엔본부가 위치한 뉴욕에 거주하며 세계 각국을 상대로 ICJ의 권고 의견 논의 과정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솔로몬 여 씨는 기후위기가 인권과 평등의 문제이며, 누구도 기후위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기후변화와 싸우는 태평양 섬나라 학생들(PISFCC)’ 솔로몬 여 캠페인 국장이 <시사IN>과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결의안 통과를 축하한다.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될 것을 예상했나?

자신은 있었다. 그동안 이 프로젝트에 많은 국가가 강한 지지를 표했다. 처음에는 이 결의안이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 갈등처럼 비춰질까 봐 우려했다. 다행히 많은 나라가 동의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이 통과됐을 때 심정은 어땠나?

결의안 표결이 진행될 당시 솔로몬제도는 새벽이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투표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에겐 중요한 투표였고, 통과됐을 때 정말 기뻤다. 이 결의안은 민주주의와 다자주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강대국의 목소리가 더 크지만, 유엔총회에서는 모든 국가가 동일하게 한 표를 행사한다. 그러한 민주적 투표를 통해, 모든 나라가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다자주의의 원칙을 확인했다.

기후위기 문제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됐나?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지식이다. 대학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깊이 배우며 국제정치적 관점을 가지게 됐다. 파리기후협약 같은 국제적 약속이 기후위기로 위협받는 사람들의 시급함과 우려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또 다른 계기는 솔로몬제도에서 자란 경험이다. 기후위기는 솔로몬제도의 환경뿐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켰다. 빈곤 수준이 높아지고, 경제발전이 지체됐다.

솔로몬제도에서는 기후위기로 인해 어떤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나?

가장 우려되는 두 가지만 꼽자면 물과 위생 문제다. 태평양 섬나라에선 사이클론(남반구 열대성 저기압. 우리나라로 치면 태풍)이 원래도 자주 발생하지만, 최근엔 더 빈번하고 강력해지고 있다. 얼마 전에 이웃 국가인 바누아투공화국이 사이클론 두 개를 연달아 겪으며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불규칙한 기상 패턴은 상수원과 위생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솔로몬제도에서는 상수도 보급이 여전히 더디다. 그런 상황에서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일어나 오염된 물만 가득하게 된다. 또한 솔로몬제도 인구 90%는 해안가에 산다. 그런데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이들이 이용하는 우물에 바닷물이 섞이고 있다. 깨끗한 물을 구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이유다. 이상기후와 홍수로 위생이 악화돼 콜레라·말라리아·뎅기열 같은 질병이 유행하게 된다.

겨우 학생 27명이 유엔총회 결의안 통과를 이끌어냈다는 것이 기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학생이 모여서 세계 각국 정부를 설득하겠다는 생각은 매우 야심차고, 한편으로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우리에겐 경험도 없고, 역량도 부족했다. 지역 시민사회에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들은 우리의 메시지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가르쳐줬다. 2019년 18개국이 모인 ‘태평양 섬나라 포럼’에서 바누아투공화국 정부가 PISFCC의 제안을 소개하며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았다.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 참여한 PISFCC 관계자들의 모습. ⓒPISFCC 제공

다른 태평양 섬나라들은 PISFCC에 동의하지 않았나?

일부 국가들은 이 프로젝트가 파리기후협약에 근거해 이뤄지는 협상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ICJ의 힘을 빌리는 것이 특정 국가에 적대적인 접근 방식으로 비춰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평양 섬나라들은 누구보다도 기후위기 문제에 적극적인 국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기후협약을 훼손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PISFCC의 프로젝트에 대해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꼭 그렇게 말할 순 없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했을 때는 ICJ에 어떤 질문을 던질지 정해진 게 없었다. 만약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우려처럼 파리기후협약을 저해하고, 오히려 기후위기 대응을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PISFCC는 처음부터 ICJ의 권고 의견을 통해 파리기후협약을 보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다만 이를 설득하고 신뢰를 얻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바누아투공화국 정부가 먼저 우리를 지지해줬고, 지역 국가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데 앞장섰다.

‘제대로 된 질문’의 조건이 무엇인가?

우선 특정 국가를 염두에 두기보다, 국가 전반의 국제법상 의무와 책임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2011년에도 남태평양 도서 국가인 팔라우 정부가 기후위기에 대한 ICJ의 권고 의견을 이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당시는 파리기후협약도 없던 시절이었거니와, 팔라우의 질문이 다소 공격적이기도 했다. 결국 몇몇 강대국들이 반발해 결의안 채택이 무산됐다. 우리는 팔라우의 전례를 참고해서 외교적 접근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여기에 더해 인권과 세대 간 형평성이라는 관점을 도입했다. 세대 간 형평성 원칙은 기후위기가 더 심해진 시기를 살아갈 미래세대의 권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ISFCC는 지속적으로 기후위기가 인권과 평등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기후위기가 어떻게 인권 문제로 연결되나?

솔로몬제도를 예시로 들며 깨끗한 물을 마실 권리가 기후위기로 어떻게 방해받는지 설명했다. 그 밖에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권리들이 기후위기로 인해 침해받는다. 심화된 식량위기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위생 문제로 건강이 악화되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 이는 모두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권리다. 기후변화가 이러한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에 기후변화가 곧 인권의 문제로 연결된다. 비단 솔로몬제도, 태평양 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도 언젠가는 직면할 문제이다. 심지어 독일 같은 나라도 대규모 홍수가 발생해 국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기후위기는 불평등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기후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불평등하다. 먼저 국가 간 불평등이 있다. 개발도상국 다수는 기후위기에 크게 책임이 있지 않은데도 더 많은 피해를 당한다. 그 자체로 부정의한 일(injustice)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국가 내 불평등이다. 기후위기는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악화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농경사회에서는 기후위기로 흉작이 빈번해지고, 소득이 줄어든다. 이로 인해 아이들을 교육하지 못하고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 역시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은 거의 없다.

선진국이 더 많은 부담을 지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미 파리기후협약에서 명시한 것이며, 국제법상 당연한 일이다. 나의 생각은 ‘선진국들이 이를 행동으로 이어가지 않고, 파리기후협약에 명시된 것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사우스퍼시픽 대학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PISFCC 회원들.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를 세상에서 제일 높은 법원으로!’라고 쓰인 피켓이 보인다. ⓒPISFCC 제공

PISFCC 보고서를 보면 파리기후협약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자주 등장한다.

우선 파리기후협약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이들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협약 자체가 아직 뿌리를 내리는 단계에 있다. 파리기후협약에는 세 가지 공백이 있다. 열의(ambition), 책임감(accountability), 공정함(equity/fairness)이다. 이 세 가지 공백과 각국의 이해충돌로 인해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온도 상승폭을 1.5℃로 제한하려는 목표 달성이 어려워지고 있다. 파리기후협약 연장선에 있는 지난해 COP27(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도 마찬가지였다. COP27에 참여한 국가들은 여전히 화석연료 사용을 단계적으로 완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COP27에서는 저마다 목표와 노력을 과시했지만, 정작 자국으로 돌아가서는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최근 한국에서도 정부가 산업계의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축소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것이 내가 말한 ‘열의’의 공백이다. 몇몇 국가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지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만큼 경제를 바꿀 열의가 없다. 그러나 국가가 목표를 낮출 때마다 전 세계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국의 경제, 자국의 이익만 고려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이다.

ICJ의 권고 의견이 파리기후협약의 공백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나?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다. 지금 상황은 신호등과 교통법규가 있지만 모두가 신호등의 기능과 법규를 잊어버린 상황과 같다. 혼돈 그 자체다. 아무리 신호등과 법규가 있어도, 이를 이해하고 해석해줄 사람이 없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후위기와 관련해 세계 각국이 약속한 협약이 있음에도, 국제법적으로 국가가 어떤 의무가 있고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ICJ의 권고 의견은 법적인 강제력이 없다. 다만 ICJ는 국제법에 관련해 법적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

기후위기로 인해 태평양 섬나라들의 각종 피해가 늘고 있다. 사진은 2015년 사이클론으로 인해 집이 무너진 바누아투공화국의 한 가정. ⓒAP Photo

강제력이 없으면 결국 논의에만 머물고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ICJ의 권고 의견 자체는 강제력이 없지만, ICJ의 해석 대상인 국제법과 협약 자체는 강제력이 있다. 세계 각국이 지키기로 합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ICJ의 권고 의견은 기후변화에 대한 각국의 책임과 의무에 관해 투명성을 제공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국제법을 위반하면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되는지 시민사회, 기업, 국민 등 모두가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다시 각국 정부에 대한 비판과 더 많은 행동을 위한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

또 다른 효과는 무엇이 있나?

두 가지 잠재 효과가 있다. ICJ 권고 의견은 각국 시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하고 있는 기후 소송에서 각 나라 법원이 고려할 만한 지침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정부를 상대로 한 기후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ICJ 권고 의견은 한국 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데 법리상의 도움을 줄 수 있다. 더욱이 기후변화의 문제를 인권 문제와 결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권과 기후위기는 결코 무관하지 않지만, 두 주제를 다루는 국제법 사이의 관계는 현재 불명확하다. ICJ에서 둘 사이의 관계가 규명된다면 인권과 기후위기 문제를 연결 지을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 것이다.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을 채택했다고 할지라도 ICJ에서 권고 의견을 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는다. ICJ는 이제껏 유엔총회에서 요청한 권고 의견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모든 기구의 요청을 통틀어 ICJ가 권고 의견을 거절한 경우는 단 한 번이다. 1996년 WHO가 핵무기에 대한 권고 의견을 요청했는데, ICJ는 이 주제가 WHO의 권한 범위를 넘어선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그런데 유엔총회의 권한 범위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ICJ가 권고 의견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ICJ 논의 과정에 많은 국가와 기관이 참여해 권고 의견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개발도상국은 ICJ 논의에 참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4월13일부터는 그들을 위한 안내서를 배포할 예정이다. 법원에서 제기할 수 있는 여러 주장, ICJ의 절차와 법정 시스템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이 책의 도움을 받은 시민들이 자국 정부가 ICJ 논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응원해주길 바란다.

주하은 기자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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