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법 거부,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농민을 걷어찼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호와 1호가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표가 내놓은 민생 법안 1호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을 윤석열 대통령이 1호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맞받아치면서 정국이 요동쳤다.
양곡법 개정안 사태는 어쩌면 '농민 혐오' 시대를 웅변하는 징후나 다름없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은 4월13일, 양곡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결국 최종 폐기됐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호와 1호가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표가 내놓은 민생 법안 1호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을 윤석열 대통령이 1호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맞받아치면서 정국이 요동쳤다. 양곡법이라는, 도시민에게는 생소한 법안 하나가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가을철 수확기도 아닌 봄철, 농업 문제가 국내 정치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농업 이슈를 최대 쟁점으로 밀어올린 장본인은 윤 대통령이다. 3월23일 국회가 양곡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4월4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2016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청문회 활성화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이래 처음이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그 자체로 정국을 경색시킨다. 현 정부 대통령실 관계자가 언론을 향해 “거부권이라는 부정적인 용어보다 법적 용어인 재의요구권이라고 해달라”고 할 만큼 정부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다.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국민의 막대한 혈세를 들여서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다.”
윤 대통령이 ‘포퓰리즘 법’ ‘강제 매수법’이라고 표현한 양곡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쌀이 과잉생산되거나 쌀값이 너무 떨어졌을 경우 정부가 이를 매수해서 쌀값을 안정시키자는 내용이다. ‘개정안’에서 달라진 점은 두 가지다. 우선 재량에서 의무로 변했다. 정부가 쌀을 ‘매입하게 할 수 있다’라는 재량 조항에서 ‘매입하게 하여야 한다’라고 바뀌었다. 여기에 논에 쌀 외 다른 작물을 재배할 경우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조항도 더해졌다.
양곡법의 목표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다. 쌀 의무 매입을 통해 쌀값을 안정시키고, 타 작물 재배 지원을 통해 과잉생산을 막고 쌀에 집중된 농업구조를 바꿔보자는 취지다. 쌀의 일시적 과잉은 의무 매입으로, 구조적 과잉은 타 작물 재배 지원으로 잡겠다는 복안이다.
쌀값은 폭락, 즉석밥 값은 오르는 현실
어제오늘 문제는 아니다. 식생활 변화로 쌀 소비가 줄면서 ‘남는 쌀’과 그로 인한 쌀값 폭락은 2000년대 이후 꾸준히 누적돼왔다. 지난해에는 쌀값이 폭락했는데 즉석밥 값은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CJ제일제당 등 식품업체들은 포장재 비용 및 연료비 상승이 가격 인상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즉석밥 가격 산정에 쌀값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동안 정부는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쌀 소득보전직불제(변동직불제), 쌀 생산조정제(논에 작물 재배 지원) 같은 제도를 운용해왔다. 변동직불제를 통해 쌀값이 일정 금액에 못 미치면 정부가 이를 보전해줬고, 생산조정제를 통해 논에 타 작물 재배를 유도함으로써 쌀 과잉생산을 방지하려 했다. 쌀에 관한 한 한국 정부는 사실상 ‘강제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온 역사가 있다.
이번 양곡법 정국의 도화선은 ‘의무화’였다. 국민의힘 등 양곡법 개정에 반대하는 이들은 쌀이 남아도는 마당에 정부가 의무적으로 쌀을 매입하면 쌀농사 의존도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반면 민주당 등 법 개정에 찬성하는 쪽에서는 의무화야말로 가장 강력한 쌀값 안정 조치인 데다, 타 작물 재배 지원 조항을 더한 만큼 생산량 조정에도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실효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농업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굳이 의무 조항을 넣어서 논란을 키울 필요가 있었느냐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매입할 수 있다’라는 현행 양곡법만 정부가 잘 지켜도 쌀값 폭락을 막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양곡법 개정안 논의는 이미 2021년부터 시작됐다. 그해 풍년으로 쌀 생산량이 늘면서 쌀값 폭락이 예상됐다. 하지만 당시 문재인 정부 농림축산식품부(농림부)가 안이하게 대처했다. 초과생산된 쌀을 ‘매입할 수 있다’라는 기존 양곡법을 발동하지 않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가 일을 키웠다. 이후 쌀값이 평균 20%가량 떨어지면서 45년 만의 대폭락 사태가 불거지자 국회에서 의무 조항을 넣은 양곡법 개정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양곡법 개정안에 대해 농업계는 환영 일색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냉소와 체념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의무화만으로 복잡하면서도 고질적인 쌀값 문제가 획기적으로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드물다. 무엇보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의무 매입 ‘기준’이 느슨해졌다. 당초 ‘초과 생산량의 3% 이상’이었던 것이 ‘3~5%’로, ‘가격 하락폭 5%’는 ‘5~8%’로 조정됐다. 말하자면 초과 생산량 5%, 쌀값 하락 8%까지는 ‘지켜봐도’ 되는 셈이다.
농민의 분노는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다.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된 지 1년이 넘도록 아무런 해법도 제시하지 못한 채 거부권만 덜컥 내놨기 때문이다. 한덕수 총리와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3월 말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을 뿐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양곡법 사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징후적이다. 우선 국내 정치사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농민을 홀대하는 정부·여당은 없었다. 과거 정부 역시 농업 예산 비중을 계속 줄이고 청와대 농업 담당 비서관을 오랫동안 공석으로 두는 등 농정에 무관심했지만, 적어도 문제가 불거지면 농민 눈치를 봤다.
특히 쌀값 문제에서는 납작 엎드렸다. ‘쌀=한국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쌀 문제를 건드린다는 것은 농민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쌀값 안정 방안을 놓고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정부는 그걸 했다. 쌀에 관한 오랜 금기를 깨버렸다.
또 하나는 쌀을 ‘시장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장의 쌀 소비량과 상관없이 남는 쌀에 막대한 혈세를 들인다”라는 표현은 지금껏 없던 말이다. 국내에서 쌀은 시장재가 아니라 ‘정치재’였다. 시장 질서와 상관없이 보호해야 할 ‘가치’였다. 이제 그 가치가 ‘정치권’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1월16일 양곡법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에 아주 놀라운 발언이 줄줄이 나온다. “밥 한 공기 다 먹자(조수진 국민의힘 최고위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도발적인 말이다. 우선 박형수 국민의힘 의원의 말이다. “쌀에 대해서는 초과생산이 되면 국가가 의무적으로 다 수매를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러면 양파는 왜 초과생산됐을 때 가격 떨어져도 방치해두느냐, 이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헌법상의 평등의 원칙에 문제가 됩니다. 이게 어떻게 위헌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의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모든 남는 쌀을 완전 격리해서 정부가 그것을 다 책임져야 한다고 미리 선포하고 가는 것은 지금 헌법 제119조 제1항에서 얘기하는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권에도 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의 말이다. “도시 근로자들은 왜 일해야 됩니까? 자기의 임금은 시장에 맡겨져서 열심히 벌어서 세금 내는데, 왜 농민은 시장 격리 조치를 의무화해서 적정 소득을 보장해야 합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이 법안은 우리 헌법 질서, 대한민국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에 굉장히 막중한 예외를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이들 국회의원은 양곡법 개정안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2월20일 대통령실 관계자발로 “양곡법 개정안에 위헌성이 있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단신 처리되고 말았지만, 이번 양곡법 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헌법을 동원해서까지 쌀의 가치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한국 정치가 걷어찬 오래된 ‘사회계약’
쌀을 시장재로 바꾸려는 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정치적이다. 현 정부의 슬로건인 공정과 자유에 반하는 ‘적’으로 삼기에 쌀만큼 좋은 것은 없다. 쌀은 ‘양파 농가, 도시 근로자, 시장경제의 적’이다. 사람들은 농민이 떼를 쓰면 정부가 달래기를 반복해왔다며 눈살을 찌푸린다.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을 갈라치기에 딱 좋다. 고령자인 농민층에서는 공론장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스피커’도 거의 없다. 게다가 쌀 농가 상당수는 호남에 있다. “화물차·건설 노동자에 이어 현 정부가 때릴 만만한 적이 바로 농민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농민도 비판받을 여지는 있다. 농업 주체로서 쌀 과잉생산 구조를 고착화한 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적어도 책임자는 아니다. “쌀 한 톨이라도 개방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라고 공언한 김영삼 대통령 시대 이후 농민은 이런 구조에 길들여졌다. 1990년대 시작된 농산물 개방에서 쌀만은 제외한 ‘쌀 예외주의’가 농정을 지배했다. 쌀농사에 편중된 정책 지원과 보조금이 이어졌고, 이는 현재 쌀 과잉생산 구조를 만들어냈다.
멀게는 박정희 시절까지 올라간다. 박정희 정부는 ‘쌀 자급률 100%’를 목표로 쌀 재배를 독려했다. 통일벼 보급을 위해 정부는 높은 값에 쌀을 사들였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계약’이었다. 농민들은 ‘쌀은 국가가 책임져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양파 파동이나 고구마 파동 때는 국가가 쌀만큼 책임지지 않았다. 다른 길을 막아놓고 쌀농사에 매달리는 구조를 만들어낸 건 국가다. 추곡 수매든, 직불금이든, 휴경 보상이든 농민이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농민이 쌀농사에 매달리느냐’고 비판하는 것이 공정한 처사일까.

정치재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쌀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위 〈그림〉을 보자. 1990년대 이후 쌀값 추이다. 1995년 20㎏에 3만143원이었던 쌀값은 27년 뒤인 2022년에도 4만6869원이다. 안 올라도 너무 안 올랐다. 소비자물가지수를 통해 단순 추산해도 1995년 3만143원의 가치는 2022년에 6만원이 넘는다. 그 결과가 ‘밥 한 그릇 원가 200원’ 시대다. 처음부터 ‘자유로운 시장재’가 되었다면 양곡법 논란 따위 없었을 만큼 쌀값은 치솟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아래 쌀 재배면적 추이도 보자. 양곡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쌀농사 의존도가 더욱 심해질 거라는 여권의 예측과 달리 쌀 재배면적은 꾸준히 줄고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고령화와 줄어드는 농민 수의 추이만큼 쌀농사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양곡법 개정안으로 쌀농사가 정말 늘어난다면 그 자체로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라는 말이 민주당에서 나오는 이유다.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김태호 교수는 ‘쌀 박사’라고 불린다.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우리 쌀의 운명을 기록한 저작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를 썼다. 양곡법 개정안 논란을 바라보는 그의 심경은 씁쓸하다. 고도 성장기 농촌과 농민은 한국인에게는 ‘마음의 빚’과 같은 존재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복지 부담을 가중시키는 존재라는 모멸적 시선이 인터넷 공간 등에서 점점 눈에 띄기 때문이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에 이어 농민 또는 시골 사람도 그 목록에 추가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혐오의 정서를 부추겨 이득을 얻으려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는 게 아닌지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다.”
양곡법 개정안 사태는 어쩌면 ‘농민 혐오’ 시대를 웅변하는 징후나 다름없다. 농민과 농촌이라는 취약한 기반 위에 정치가 훅 들어왔다. 지난 수십 년간 농민을 정치적으로 ‘가스라이팅’ 해놓고 이제 와서 ‘깨어나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은 4월13일, 양곡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결국 최종 폐기됐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