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당 7만원’ 와인·위스키와 잠들었던 참나무통 진한 맥주...애주가 유혹하네

유진우 기자 2023. 4. 2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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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캔 1만원’ 불길이 수제맥주 시장을 싸그리 태워버린 자리에 ‘1병 3만~7만원’이라는 새 맥주가 점차 입지를 넓히기 시작했다.

배럴 에이징 맥주(Barrel Aging Beer)라 불리는 이들 맥주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담았던 참나무(오크)통에서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2년 이상을 추가로 숙성해 맥주 맛과 향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이 특징이다. 배럴 에이징이라는 말은 참나무통을 뜻하는 ‘배럴’과 숙성을 의미하는 ‘에이징’을 더해 만든 단어다.

배럴 에이징 맥주는 양조자 능력에 따라 와인과 위스키 못지 않은 매력적이고 복합적인 풍미를 구현할 수 있다. ‘위스키 본고장’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브루어리 테넌츠의 위스키 오크 맥주는 맥주와 위스키를 절묘하게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파운더스 브루잉의 ‘KBS’는 양조 과정에서 커피와 초콜릿을 넣어 미국 버번 위스키를 숙성했던 참나무통에서 익힌다. 이 맥주는 ‘가히 맥주와 커피, 초코라테와 버번 위스키 경계를 넘나드는 걸작’이라는 호평과 함께 거대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그동안 수제맥주사가 직접 만든 배럴 에이징 맥주를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에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담았던 참나무통이 전무(全無)해 전량 수입해야 한다. 오랜 숙성기간을 감당할 공간과 비용 역시 일반 맥주에 비하면 훨씬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가격도 높아진다.

그러나 최근 여러 국내 브루어리(맥주 양조장)들은 최근 저마다 적지 않은 자본을 투자해 새 배럴 에이징 맥주를 경쟁하듯 선보이고 있다. 주류 전문가들 역시 배럴 에이징 맥주가 가격 경쟁으로 점철됐던 수제맥주 시장을 뒤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2022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수제맥주 전문기업 오리지널비어컴퍼니는 지난 19일 오후 5시부터 서울 삼성동에서 미국 버번위스키를 숙성했던 참나무통에서 2년 동안 묵힌 ‘문라이트 에일 배럴 에디션’을 선보였다.

이 맥주는 서로 다른 참나무통을 오가며 2년을 익혀 위스키에서나 맛볼 수 있는 건포도와 건자두 향을 진하게 입혔다. 여기에 좋은 위스키에서 느낄 수 있는 말린 과일 향과 참나무통이 주는 특유의 깊은 바닐라, 캐러멜 풍미가 더해져 평소 마시던 상쾌한 라거와는 다른 맛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맥주 가격은 1병당 7만7000원에 달한다. 요즘 편의점에서 맥주 4캔 행사 가격이 1만1000원임을 감안하면, 28캔을 살 수 있을 만큼 비싼 값이다. 그러나 소비자 반응은 뜨거웠다. 오프라인 매장 뿐 아니라 카카오톡과 네이버 스마트오더로 주문이 이어졌다.

그래픽=손민균

이보다 앞서 제주맥주가 출시한 제주맥주 배럴시리즈 역시 경쟁률이 최고 20대 1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제주맥주는 2020년부터 대량 생산하는 일반 맥주와 차별화한 배럴 시리즈를 선보였다.

첫 작품 ‘임페리얼 스타우트 에디션’은 220년 전통 스코틀랜드 위스키 브랜드 하이랜드파크와 함께 12년 동안 싱글몰트 위스키를 넣었던 참나무통에서 11개월간 숙성한 제주맥주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선보였다. 이 맥주는 당시 한 병에 2만원이었지만, 준비했던 물량 3000병이 온라인 사전 예약으로 사흘 만에 다 팔렸다.

이듬해 2021년 ‘커피계의 애플’을 표방하는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과 협업한 ‘블루보틀커피 에디션’은 사전예약 3일 만에 신청자가 1만1000명을 넘었다. 경쟁률은 20대 1에 달했다. 이 맥주는 이전 시리즈보다 비싼 3만3000원임에도 편의점에 풀린 3000병조차 6시간 만에 매진을 기록했다.

지난해 가로수길 유명 초콜릿 전문점 삐아프와 손잡고 내놓은 ‘제주맥주 배럴 시리즈 삐아프 아티장 쇼콜라티에 에디션’ 역시 작년 빼빼로데이와 크리스마스, 올해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시즌에 맞춰 내놓은 물량이 매번 품절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들 뿐 아니라 칠홉스 브루잉이 만드는 ‘더블 배럴 발리 와인’, 부산 고릴라 브루잉의 ‘마고타이’, 안동맥주의 ‘고즈넉’ 등도 참나무통에서 숙성하는 방식으로 개성을 더한 맥주들이다.

칠홉스 브루잉 더블 배럴 발리 와인은 미국 버번 위스키 배럴과 16년 된 콜로라도 위스키 배럴에서 묵혀 달큰한 향을 강조했다. 고릴라 브루잉 마고타이는 레드와인을 익힌 참나무통과 샤르도네 품종 화이트 와인에서 숙성한 맥주를 섞어 만들었다. 와인이라면 시도하기 어려웠을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향의 조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맥주다. 안동맥주 고즈넉은 홍성 스펠트밀과 안동서 키운 금강밀로 만든 맥주를 직접 수확한 국산 청수(靑水) 품종 포도와 함께 숙성해 묵직함과 상큼함을 동시에 구현했다.

배럴 에이징 맥주는 단순히 일반 맥주를 와인이나 위스키를 묵힌 통에 넣어 가만히 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반대로 훨씬 손이 많이 간다. 배럴 에이징 맥주를 만들려면 맥주 주 재료에 해당하는 맥아와 홉, 효모 조합을 양조 초기 단계부터 지속성을 감안해 일반 맥주와는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 레시피를 뒤바꾸는 수고로움에서 시작해 통에 들어간 그 이후부터는 이전보다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참나무통에 들어가 얼마나 잘 숙성되는지 여부에 따라 긴 시간 공들여 만든 맥주가 그 가치를 인정 받을 수도, 혹은 팔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베버리지마스터협회 관계자는 “현대 맥주 생산에서 스테인리스와 알루미늄 설비가 주를 이루면서 참나무통에 맥주를 숙성하는 방식은 오랜 기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며 “숙성을 잘 하면 참나무통에서 흡수한 은은한 나무향과 자연스러운 바닐라향, 코를 떼기 어려울 정도로 풍성하고 깊이 있는 맥주 본연의 향이 균형을 이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반대로 숙성 이후 관리에 실패하면 맥주가 가지고 있던 힘이 빠지면서 맛과 향 모두 날아가 버린다”고 덧붙였다.

대체로 배럴 에이징 맥주들은 숙성 기간을 버틸만큼 높은 알코올 도수를 자랑한다. 최소 6도에서 시작해 일반적으로 8~9도를 넘나들고, 도수가 높은 배럴 에이징 맥주들은 12도까지 올라간다. 입 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맥주 맛을 좋아하는 소비자라면 배럴 에이징 맥주를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가벼운 라거(lager) 스타일 맥주를 선호하는 대중적인 소비자라면 거리감을 느끼기 쉽다.

주류 전문가들은 여러 브루어리가 저마다 개성을 갖춘 배럴 에이징 맥주를 내놓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 나가면서 매니아들과 일반 소비자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편의점 중심 ‘콜라보레이션’에 갈 곳을 잃었던 수제맥주 시장이 다시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수제맥주협회 회원사 관계자는 “맥주를 배럴에서 숙성하면 수제맥주에서만 찾아볼 수 있던 차별화한 맛이나 다양성을 분명하게 강조할 있어 이름만 바꿔 나오는 협업 수제맥주 상품에 식상함을 느꼈던 소비자들을 다시 끌어올 수 있을 것”이라며 “와인과 위스키와 맛과 향 측면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뚜렷해 맥주 고급화 차원에서도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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