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테크니카 시대'…정병선 원장 "민관 합동 R&D 전략 펼쳐야"
"R&D 기획단계부터 산업계 의견 반영해 정책 입안"
"산·학·연 협력해 '딥테크 스케일업 밸리' 조성 목표"
과학기술이 곧 국력인 '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기술 패권) 시대를 맞아 민·관 합동 R&D(연구개발)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속에서 한국이 양자 택일을 강요받지 않으려면 민관이 의기투합해 '국가전략기술'을 중점 육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병선 KISTEP(한국과학기술기획원) 원장은 최근 머니투데이와 인터뷰에서 "R&D 기획 단계부터 산업계 의견을 반영해 실용화 연계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이를 통해 정부 부처의 목표 달성이 아닌 경제·사회적 임무 중심의 통합 R&D 배분·조정 체계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정부가 질적 성장을 주요 정책 목표로 설정한 것에 발맞춰 12대 국가전략기술과 같은 국가 수요 기반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12대 전략기술은 지난해 10월 '제2·3의 반도체' 기술을 만들어 패권경쟁에 대비하자는 취지로 민관이 함께 꼽은 분야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인공지능 △첨단모빌리티 △차세대원자력 △첨단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수소 △사이버보안 △차세대통신 △첨단로봇·제조 △양자 등이다.
정 원장은 산학연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며 '딥테크 스케일업 밸리' 육성 계획도 밝혔다. 딥테크란 오랜 과학적 연구나 이전에 없던 공학기술로, 이를 스케일업(Scale-up·규모 확대)해 혁신 생태계를 만들자는 의미다. 독일의 경우 양자기술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양자컴퓨팅, 센싱, 이미징, 기초연구 등 7개 클러스터를 연계한 '양자 연합체'(Quantum Alliance)를 운영 중이다.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관련한 추진 방안을 마련 중이다.
아래는 정 원장과 일문일답.
-전략기술 육성을 위해 인재육성을 강조했는데.
▶그렇다. 인재 확보가 중요하다. 12대 국가전략기술은 분야별 산업의 성숙도나 기술 수준이 다르므로 필요한 인력의 규모나 수준도 다르다. 예컨대 양자기술 분야는 상용화 전이기 때문에 박사급 핵심인재를 확대하기 위한 '양자대학원 설립'이나 '국가 차원의 양자 클러스터 구축'과 같은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이차전지 분야는 산업 인력 수요가 크다. 산업 수요 연계 석·박사 양성과정 확대, 차세대 이차전지 상용화 연구센터 설립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인재육성에 또다른 고려사항은 무엇인가.
▶저출산, 인구구조 변화다. 한정된 인적 자원 속에서 전략기술 인재풀을 확대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내연기관처럼 산업 변화로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분야를 첨단 모빌리티 분야로 유입시키기 위한 재교육이나 전환교육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이처럼 체계적인 지원을 위해선 전략기술 인재 현황과 수요를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논문·특허 기반 핵심연구자 분석, 산업계 인력 수요를 파악해 인력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기초연구 투자 방향은.
▶문재인 정부는 '기초연구 예산 2배 확대'를 통해 기초연구 저변을 확대하는 데 힘썼다.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양적 성장을 기반으로 세계 선도 수준의 기초연구 역량을 축적하고 질적 성장을 주요 정책 목표로 설정했다. 구체적으로 국가전략기술과 같은 국가 수요를 반영한 전략적 기초연구 지원을 강화한다. 또 반도체와 바이오 등 기획 단계부터 산업계 의견을 반영해 실용화 연계 방안을 찾을 예정이다.
-민·관 합동 R&D의 구체적 사례가 있나.
▶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2023~2027년) 추진과제 중 하나가 '민간 주도 혁신을 통한 성장동력 확보'다. 현재 산업계를 중심으로 기술·산업별 협의체와 관계부처 간 협력 채널을 마련하고 있다. 기업 수요를 정책 수립, 예산 배분·조정, 제도 개선 등에 반영할 계획이다. 과기정통부는 '민간연구개발 협의체'를 탄소중립, 신재생에너지, 바이오, 미래모빌리티, 디지털전환 5개 분야로 확대 개편했다. 이 협의체는 산업 분야별 기업의 CTO(최고기술책임자)들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정부가 탄소중립이나 우주 등 임무중심 R&D를 강조하는데, 그동안 한계가 있지 않았나.
▶그렇다. 국가 차원의 경제·사회적 임무를 해결하기보다 해당 부처의 정책·기술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그친 것이 사실이다. 정부 R&D 총액은 늘어났지만, 중장기 대형 R&D 사업보다 소규모 단기 R&D 사업이 늘고 사업도 파편화됐다. 그 결과 부처 간 연계에 한계가 드러났다. 임무중심 R&D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임무 설정이다. 임무 설정 과정에서 기업, 연구자, 시민사회 등 민관 협력을 촉진해야 한다. 이를 통해 경제·사회적 임무 중심의 통합적 R&D 배분·조정 체계로 변화해야 한다.
-임무중심 R&D 성공 사례가 있나.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 차세대 평판 디스플레이 개발부터 최근 한국형발사체 누리호까지 있었다. 앞으로는 국가전략기술과 탄소중립이 그 뒤를 이어야 한다. '2050년 탄소중립'이라는 명확한 국가적 임무가 정해진 상황에서 온실가스 감축 기여를 위한 부문별 R&D 로드맵을 수립 중이다. R&D 로드맵 이행 시 범부처가 참여하는 체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 계획은 무엇인가.
▶기업과 출연연, 거점대학 간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칭 '딥테크 스케일업 밸리'를 육성하고자 한다. 산학연 협력을 도모하고 집적지구 내 기술·인력·자금의 선순환을 통해 혁신기업 성장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목적이다. 강소특구 등 기존의 클러스터 지역을 우선 활용하는 방향으로 관련 부처에서 추진 방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주요국 사례를 보면 캐나다는 워털루 대학을 중심으로 IQC(양자컴퓨팅연구소), QNF(양자나노팹) 등을 집적해 기초연구부터 상용화, 스타트업 육성 투자, 기업관리를 지원하는 '양자 특성화 지역'을 운영하고 있다. 독일도 양자기술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분야별 7개 클러스터를 지정했다. 딥테크 스케일업 밸리는 기초-응용-개발-사업화라는 기존의 선형모델을 벗어나 각 연구단계와 혁신주체가 융합하는 혁신 생태계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민간 기업이 공공 R&D 분야와 협력이 쉽지 않은데.
▶국가연구개발 성과의 민간 활용을 장려하기 위해 국가연구개발 성과와 기업의 수요를 매칭 해주는 '통합성과활용플랫폼'을 구축할 계획이다. 현재는 R&D 성과 관리 전담 기관별로 성과 정보가 분산돼 있어 기업이 원하는 정보를 찾기 어렵다. 이 플랫폼에서는 기업의 수요 기술을 파악해 연구자를 연계해주고, 기업이 보유한 성과를 발전시킬 수 있는 후속 R&D 과제도 추천해 줄 수 있다. 연구자에게도 본인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기업을 추천해 주기 때문에 기업의 잠재적 수요에 선제 대응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김인한 기자 science.inh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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