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한·일 시민연대가 찾아낸 일제 강제노동 700명의 기록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는 한국인들 그리고 적잖은 일본인들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예민한 역사 문제로 떠올라 있다. 한·일 시민들은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론’에 맞서기 위해 탄광을 둘러싼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의 진실을 규명하는 공동조사보고서 작성에 나섰다. 이들은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러 자료와 증언을 하나로 모아 사도광산을 둘러싼 역사적 진실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보고서를 완성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일본의 역사 연구가 다케우치 야스토와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난 6일 <한겨레>와 만나 한·일 시민들과 유족들이 노력한 결과, 의미 있는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고서 작성 계기는?
김승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 부정론’이다. 2015년 군함도 등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이 등재된 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일본 정부가 선전하는 역사가 아니라 ‘시민들이 기억하는 역사성은 이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사도광산은 아직 등재가 안 돼 있다. 일본과 2021년께부터 지난 30년간 조사한 것을 망라해 공동조사보고서를 내자고 의견을 모았다. 등재 여부를 정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현지 실사가 이뤄지기 전에 보고서를 통해 한·일 시민들의 의견을 전달하려 했다.”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다케우치 “기본 자료는 미쓰비시광업의 조선인 숙소인 소아이료(相愛寮) 명부였다. ‘소아이료연초배급대장’이란 자료엔 1944년 10월~1947년 7월 이곳에 수용돼 있던 이들의 명단과 이동 상황과 관련된 서류가 수록돼 있다. 지역사를 연구하던 혼마 도라오(1926~2006)가 수집해 갖고 있던 이 자료를 1991년 8월 사도섬의 절 ‘쇼코사’의 하야시 미치오(76) 스님 등 지역 시민들(1991년 ‘과거·미래 사도와 한국을 잇는 모임’ 결성)이 입수했다. 이 자료는 한동안 소재를 알 수 없었는데 2021년 말~2022년 초 사도에서 1990년대 활동 자료를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명부의 복사본을 확인했다. 여기에 1990년대 일본 시민들이 자체 조사한 자료와 한국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접수된 피해신고 자료를 더했다. 이를 통해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1500여명 가운데 이름·주소·생년월일과 이들이 언제 동원되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언제 귀국했는지 등을 정리한 700여명 정도의 명부를 완성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다케우치 “자료들이 정리가 안 된 채로 난잡하게 남아 있었다. 1970년대 당시 광산에서 일했던 노무반원 스기모토 소지의 편지나 시부야 세이지의 증언 녹취 테이프들이 방치돼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들으면, 자신들이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다는 자각이 없다. 그래서 ‘모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경찰 자료를 통해 이 동원은 국가 정책에 따른 동원이고, 식민체제 아래 강력한 행정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모집(이후엔 관알선·1944년 4월 미쓰비시광업이 군수회사로 지정된 뒤 모두 군수징용됨)은 강제력에 의한 동원이라 위치 지어져야 한다. 실제 경찰 자료를 통해 사도광산에서 도망을 친 이들을 사할린에까지 지명수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쪽 자료는 위원회가 해산된 뒤 자료들이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돼 (개인정보 보호 등의 이유로) 외부 공개가 제한돼 있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지원재단)의 도움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를 열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1990년대 사도 시민들이 활동을 시작한 배경은?
다케우치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1년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5월 일본을 방문해 피해자 명부를 달라고 했다. 냉전이 끝난 뒤 한국에서 피해자들이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대통령을 움직인 것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혼마를 통해 명부를 얻은 사도 시민들은 (사도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많았던) 충청남도에 가 조사를 했다. <대전일보>가 이들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임덕규 전 국회의원이 적극 도왔다. 이렇게 만난 피해자·유족들은 1990년대에 두차례나 사도·니가타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 참가했다. 이 증언 집회 테이프도 그냥 보관만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2022년에 발견해 디지털화했다. <엔에이치케이>(NHK) 니가타 방송국에선 이 활동을 1992년 6월 ‘60년의 진실 사도광산 강제연행의 상처’로 방영했다.”
―보고서가 한·일 사회에 갖는 의미는 뭘까?
김승은 “한국에선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 규명과 피해보상 노력이 시작됐다. 이후 위원회가 만들어져 많은 분들이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피해심의 결정통지서를 보면 ‘법 몇조에 의거해 피해자임을 결정합니다’라는 한줄뿐이다. 유족들은 여전히 아버지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잘 모른다. 8살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기침을 자주 하시고 평생 아팠던 기억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강제동원의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은 무엇이었나. 이번 조사를 하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
1905년생 정쌍동(1986년 작고)은 전라북도 익산에서 동원됐다. 마을에서 아무도 안 가려 해 제비뽑기를 통해 30대가 넘는 나이에 갔다. 그 아들 정운진은 이 사실만 알지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 몰랐다. 그게 자식으로서 너무 큰 부끄러움이었다(정씨는 20~23일 사도섬을 방문했다). 명부 속의 인물들이 조사 과정을 통해 실체로 확인되고 유족들과도 연결됐다. 강제동원 피해가 구체적인 실체로 되살아나는 과정이었다. 이게 이번 보고서와 우리 활동의 가장 큰 의미인 것 같다.”
다케우치 “일본 내 역사 부정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강제노동이 없었다’며 2021년부터 이에 대한 교과서 기술도 지우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 정부의 이런 인식을 전제로 지난달 6일 한국 지원재단이 (일본의 피고기업 대신) 위자료를 대신 부담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일본 기업은 사죄·배상도 안 하고, 일본 정부도 사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시 동원은 조선인들도 ‘천황의 적자’이니 목숨을 바치라는 식민지배의 통치 시스템 아래서 이뤄졌다. 이를 피해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도, 식민지배에 대한 추궁도 어려워진다.
일본 정부는 잘못된 역사 인식 아래서 메이지 산업유산이나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 손님을 불러 모아 돈을 벌려 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강제노동이 없었다는 ‘역사 부정론’을 극복하고 싶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일본 사회 내의)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나 헤이트 크라임(혐오범죄)도 극복할 수 없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아시아인들과 일본이 평화를 만들어가는 기초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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