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전기차·배터리 ‘미국 우선주의’…‘투자 보류’ 강공도 필요하다
[2023 한-미 정상회담]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얻어올지에 관심이 높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에스케이(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엘지(LG)그룹 회장 등 122명 규모의 대규모 경제사절단도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한다.
미-중 패권 경쟁과 자국 우선주의가 심화하면서 국내 전략 산업의 입지가 위협을 받는 가운데 윤 대통령이 ‘국빈’ 대접을 받는 것을 넘어서, 점증하고 있는 경제 불확실성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통상과 산업 등 전문가 12명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반도체 지원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국내 산업·기업에 영향을 주는 미국의 제도들이 입법 완료된 터라 운신의 폭이 크지는 않지만 물밑 협상을 통해 국익 확보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전문가 조언이 적지 않았다. 이미 윤 대통령이 러시아와 중국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무기 수출과 대만 관련 발언을 내놓으면서, 국내기업들의 시장은 상당히 위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상태다. 당장 오는 10월 유예기간 만료 전에 반도체 장비 중국 반입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숙제도 있다.
장비 수출 통제·반도체법 독소조항 테이블에 올려야
정부는 이미 반도체 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해소됐다고 본다.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들 ‘국지전’까지 손 놓아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오는 10월로 유예가 끝나는 중국 내 반도체 장비 반입 통제가 있다.
이규석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 내 한국 공장을 업그레이드하려면 첨단 장비들을 중국으로 조달해야 한다. 유예기간 만료 시점인 10월 뒤 중국 내 장비 반입이 어렵다면 증설은 어렵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미국 기술이 적용된 장비의 중국 반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하면서 시행 시기를 1년 유예한 바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10월 유예 만기 전까지 중국 장비 반입 통제 조처 대상에서 한국 기업을 배제하거나 유예기간을 연장한다는 답을 (정부가) 받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지원법 보조금 신청 요건에 포함된 독소조항을 협상 무대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생산시설 접근 허용 △초과이익 공유 △영업 회계자료 제출 △중국 공장 증설 제한을 핵심 문제 조항으로 꼽은 바 있다.
삼성전자는 당장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내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한 위탁생산(파운드리) 공장을 250억 달러(약 33조원)를 들여 짓고 있다. 향후 20년에 걸쳐 총 1900억 달러를 투자해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 11곳을 신설하는 중장기 계획도 검토 중이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도 미국에 반도체 연구개발(R&D) 협력과 메모리 반도체 첨단 패키징 제조 시설 등에 15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이는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의 1997~2020년까지 중국 투자금을 훌쩍 뛰어넘는다.
김양팽 연구원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투자 규모가 수백억 달러 규모다. 반도체 기업 총수가 동행하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물밑에서라도 문제 조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이 강경 태도를 고집할 경우 투자 보류와 같은 강공도 한국 정부가 협상 카드로 들고 있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일관된 메시지 필요”…방미 이후 과제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 세부안이 이달 공개된 뒤 완성차·배터리 업계의 희비는 사실상 결정됐다는 분위기다. 중국산 배터리 접근이 미국 시장에 제한되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는 “광물의 중국 의존 문제가 남았지만 일단은 한 고비를 넘겼다”는 짚었다.
그러나 완성차 회사들은 사정이 다르다. 현대차의 전기차 G70은 미국 내 조립 완성차인데도 에스케이(SK)온의 중국산 배터리가 탑재돼있다는 이유로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탈락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한미 정상회담 한 번의 이벤트에 집중하기보다는, 한국의 주요 전략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미-중 패권 구도 속 ‘전략적 줄타기’와 장기적 관점의 산업 육성 전략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미국과 한국 모두 전략 산업이 반도체와 자동차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 요구대로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규정하면 한국은 중·러는 물론 동남아 시장까지 잃는다”며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것을 얻어오려고 하기보다 외교 관계 설정 자체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단기적으로는 현대차·기아가 미 현지 공장을 전기차 생산기지로 빨리 전환하는 게 유일한 방책”이라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방미 이후 어떤 산업을 육성할지 등의 우선순위를 고민해 전략적으로 정부가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국 우선주의는 부메랑 초래… 일관된 메시지 전달해야”
통상 전문가들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동맹국인 한국은 물론 세계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윤 대통령과 한국 정부가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에서 미국은 대중 경쟁력에 따라 다른 노선을 보이고 있다. 그때그때 이야기가 다르면 우방국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불확실성이 커진다. 우리 정부는 공급망 재편에 대해서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며 투명하고 호혜적인 관점을 지녀야 한다고 (미국에) 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그에 기반한 공급망 재편 전략은 동맹국, 우방국 사이 협력과 연대에 균열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근시안적인 해결책에 그칠 수 있으며 한국의 국익과도 충돌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반도체지원법, 인플레이션감축법이 발효될 때 허둥지둥 대처하는 바람에 기업들이 이에 대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박정호 에스케이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3월 미-중 반도체 패권 갈등이 촉발한 경영 불확실성에 대해 “한 회사가 대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반도체·전기차 외에도 핵심 광물, 의약품, 군수, 아이티(IT) 기술 등 미국 정부와 협의해야 할 과제는 많다.
박복영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자유 무역 질서에 대한 회복, 자유로운 통상 환경이 세계 경제 번영의 기초가 된다는 데 대한 공감대를 구축하는 계기로 이번 정상회담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자국 우선주의 정책 탓에 세계 경제규모(GDP)가 장기적으로 2%까지 감소한다는 추정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박복영 교수는 “(미국이) 지금과 같은 대결적 경제 구조를 계속 가지고 가면 아세안 국가들이나 비동맹 국가들이 미국으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며 “우리 역시 중국과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 입장이 대단히 곤혹스럽다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지난해 11월),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올해 3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올해 4월) 등 각국 정상들은 차례로 중국을 방문해 미국의 탈동조화(디커플링) 전략을 따르지 않을 것을 드러낸 바 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옥기원 기자 ok@hani.co.kr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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