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반도체가 어려우면 자동차가 있다
1980년대 일본 미쓰비시 엔진을 받아쓰던 현대차가 국산 엔진 개발에 나섰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전투기 ‘제로센’ 엔진을 개발했던 구보 도미오 미쓰비시 회장이 정주영 현대 회장을 찾아왔다. “엔진 개발을 포기하면 로열티를 50% 깎아주겠다”. 매년 영업이익 절반을 로열티로 내던 처지에서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정 회장은 거절했다. ‘엔진 개발 능력을 가져야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단이 오늘의 한국 자동차 산업을 만들었다.
▶현대차가 4기통 휘발유 엔진 개발에 성공하자 구보 회장이 현대차 연구소를 찾아와 “가장 어려웠던 게 뭐냐”고 물었다. 개발팀장은 “엔진 열변형을 잡는 게 어려웠다”면서 엔진에 온도계 200여 개를 꽂아 열변형을 측정한 시제품을 보여주였다. 구보 회장은 귀국하자마자 기술진을 불러 모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10년 내에 현대차에 역전당할 것”이라고 호통쳤다.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미쓰비시는 2005년부터 현대차에 로열티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1986년 엑셀을 앞세워 미국 수출 시장 문을 두드렸다. 고장이 잦아 조롱거리가 됐다. 미국 TV 토크쇼에선 “출발할 때 뒤에서 밀어야 하고, 내리막길에서만 달리는 1인용 썰매가 뭔지 아세요? ‘현대’랍니다”라고 놀렸다. 영국 BBC방송은 현대차 엑센트를 ‘엑시던트(사고)’라고 조롱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10년·10만마일 보증수리’ 승부수를 던졌다. 3년 만에 대미 수출이 3배로 늘어났다.
▶미쓰비시는 망해서 닛산에 인수됐지만, 현대차는 글로벌 5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지난해 684만대를 생산한 현대차그룹 덕에 한국 자동차 산업은 874억달러(부품 포함)를 수출해 반도체(1292억달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올 1분기 중에는 자동차가 반도체를 제치고 수출 1위(171억달러)로 올라섰다. 130억달러 흑자를 내며 반도체 대신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70년 전 미군 지프를 개조한 ‘시발자동차’로 시작한 한국 자동차 산업이 미래차 분야에선 선두 그룹이다. 1회 충전에 524㎞를 달리는 현대 아이오닉5는 ‘2022년 세계 올해의 차’, 3.5초 만에 시속 100㎞를 찍는 기아 EV6는 ‘2022년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전기차 황제 일론 머스크도 찬사를 보내고 있다. 현대차는 내연기관개발센터를 배터리개발센터로 대체하며 전기차에 올인하고 있다. 국산 엔진 개발, 10만마일 무상 수리에 이어 한국 자동차 산업사에서 제3의 변곡점으로 기록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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