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모두 쓸모있고 모두 쓸모없다
일렬종대 질주중인 한국 X·Y·Z 세대… 오늘의 쓸모도 내일이면 끝
순환은 자연의 섭리… 변하지 않는 건 자식 향한 부모 사랑뿐인가
요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세대 간 갈등이라는데, 19세기 러시아도 비슷한 경우를 겪은 적이 있다.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가 서로 부딪쳐 대립하던 당시를 배경으로 투르게네프는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썼다.
1840년대 러시아의 아버지 세대는 귀족 계층 중심의 서구식 자유주의자였다. 서구 교육을 받아 헤겔을 읽으며 ‘진보’를 논하던 이들이지만, 1860년대 세대인 아들 눈에 그 진보는 말뿐인 관념이요 낭만에 불과했다. 과학적 실증주의와 공리주의를 신봉한 아들이 볼 때, 아버지 시대는 유통 기간이 지났고, 그러니 기여도를 상실한 전 시대 모든 것은 부정되어 마땅했다. 비판 의식과 냉소로 가득 차 기존 가치 질서에 반항했던 아들 세대를 일컬어 ‘니힐리스트(nihilist)’라 한다.
가령 선량한, 게다가 그 나름대로 진보적인 아버지가 평화로이 시집을 읽고 있으면, 아들이 나타나 책을 빼앗는다. 그런 쓸모없는 책은 집어치우고, ‘뭔가 실질적인 것’을 읽으라는 말이다. 아들 세대는 줄곧 ‘쓸모’와 ‘실용’을 이야기한다. 성실한 과학자가 시인보다 스무 배나 쓸모 있고, 돈벌이 안 되는 예술은 아무 소용 없으며, 인간은 오직 자신에게 유익한지 아닌지 계산에 따라 행동한다는 식이다. 남녀 관계는 생리적 현상일 뿐, 사랑은 ‘꾸며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단언한다.
그러나 그는 역설의 주인공이다. 사랑을 부정했지만 온몸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고, 죽음의 의미를 부정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들이닥친 죽음에 대해서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 ‘죽음을 부정해본들, 죽음이 나를 부정하는 순간, 그것으로 끝장이구나!’ 자조하는 주인공은 서글픈 인간이다. 그는 전도 유망한 자연과학도였다. 평소 개구리 해부를 일삼았는데, 마을의 전염병 환자 시체를 해부하다 실수로 감염된다. 만사 자신만만하고 공격적이었건만, 죽음과 관련해서는 아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존재가 ‘무(nihil)’로 바뀌는 임종 문턱에서 그는 자신의 효용성을 최후로 저울질한다. 자신은 과연 필요한 존재였던가? ‘러시아는 나를 필요로 해. 아니, 필요치 않아. 그럼 누가 필요하지? 제화공은 필요하고, 재봉사는 필요하고, 푸주한은 고기를 팔고…. 푸주한은… 잠깐만, 헷갈린다. 저기 숲이 있구나….’
질문은 단순 명료하나, 대답은 그렇지 못하다. ‘헷갈린다…. 저기 숲이 있구나….’ 섬망의 헛소리였을 수도, 무의식의 참소리였을 수도 있을 이 헷갈림이야말로 어쩌면 ‘쓸모’라는 화두의 종착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쓸모와 쓸모없음의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20대에 죽어간 유망한 청년, 시골 부모의 자랑이자 친구의 우상이던 그는 세상이 필요로 했던 사람인가, 아닌가? 누가 필요한 사람이고 누가 필요치 않은 사람인가? 무엇이 진짜 쓸모고 무엇이 진짜 쓸모없음인가? 헷갈린다. 쓸모 있는가 하면 쓸모없어 보인다.
‘필요’에 집착한 19세기 러시아인의 화두는 ‘쓸모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실용과 효용의 깃발 든 시대는 자연의 삶을 추월해 저만치 앞서가 있고, 그 뒤를 쫓아 Z세대·M세대·Y세대·X세대 일렬종대로 달리는 광경이 떠오른다. 사실 세대 간 갈등의 본질이란 무엇이 쓸모 있고 무엇이 쓸모를 다했다고 보는가 하는 각도 차이다. 삶이 그 저울질의 연속이다. 쓸모를 다한 것이 한때는 쓸모 있었고, 오늘의 쓸모가 내일이면 사라질 수 있다. 쓸모없다 여겨져 폐기했더니 금방 다시 절실해지는 아이러니도 있다. 그러니 모두 쓸모 있고, 또 모두 쓸모없다.
그것이 순환하는 자연과 세대의 논리라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투르게네프가 주인공의 마지막 시선을 숲으로 향하게 하는 이유가 어쩌면 그것일 테다. 요동치는 세상사에서 유장한 자연으로의 관점 이동이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시선 역시 갈등의 이 세계에서 들어 올려 평온의 거처인 저 너머 세계 입구로 옮겨 놓는다. 아들의 무덤을 찾아온 노부모가 오래오래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끝 장면은 감동적이다. 존재의 소멸은 모든 대립을 잠재우는 법. 죽은 아들을 위한 노부모의 사랑은 쓸모를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덤에 핀 꽃들은 자연의 저 ‘초연한’ 정적을, 영원한 화해와 평화와 생명의 연속을 말해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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