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AI 시대의 ‘오래된 농담’
어렸을 때 ‘마이컴’이라는 컴퓨터 잡지를 사 모으는 게 낙이었다. ‘내가 만들었어요’라는 코너를 가장 기다렸다. 독자들이 자기가 만든 프로그램을 선보이면서 그 소스코드를 공개하는 꼭지였다.
잡지 안에는 동작 화면과 함께 베이식(BASIC)이나 C언어 등의 코드 3000~4000줄이 몇 페이지에 걸쳐 인쇄돼 있었다. 그걸 며칠이 걸려 손으로 쳐서 넣은 뒤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실행 키를 눌렀다. 물론 ‘구문 오류’가 떴다. 그 많은 행을 입력하는데 빠뜨리지 않거나 오타를 안 낼 수는 없었다. 한 줄씩 확인하며 하나하나 잡아야 했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을 정리하면서 30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현재 공직자 재산 내역은 관보나 공보로 공개한다. 일단 ‘디지털’인 전자문서(PDF)로도 나온다. 그러나 종이문서 양식을 전자적으로 복제한 것에 불과한 이 파일은 ‘디지털 처리’가 불가능하다. 의심 가는 내역이 있어도 사람·재산별로 정렬하거나 특정 조건으로 필터링해서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수천명이나 되는 공직자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기 어렵다. ‘엑셀’이 아닌 ‘한글(혹은 워드)’ 문서로 정리한 매월 급여명세서의 합을 내거나 추이를 살펴보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시민단체나 언론사에서는 이 파일을 ‘깨서’ 스프레드시트 형태로 변환하는 작업을 매년 도 닦는 기분으로 수행하고 있다. 잘못된 수치는 한 줄씩 살피며 바로잡는다.
재산공개 제도도 30년 전에 도입됐다. 그때는 ‘로터스 1-2-3’이나 ‘엑셀’을 쓰는 사람이 흔한 시절은 아니었다. 오늘날은 코드를 공유하는 ‘깃허브’ 같은 사이트를 숨 쉬듯 쓴다. 수천줄의 코드를 입력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상한 눈빛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절에 우리는 아직도 공직자 재산 내역 수만줄을 스프레드시트에 입력하고 검수하는 일을 한다.
재산공개 제도 개선 촉구를 위해 6개 시민단체가 모인 ‘재산공개와 정보공개 제도개선 네트워크’(재정넷)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손으로 적어내던 시절의 서식을 그대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3년 이명박 당시 국회의원의 재산 내역을 보니 그렇다. 타자기로 작성한 문서인데, 양식은 지금 전자문서와 똑같다. 손으로 적던 시절에 비해 정확도도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재정넷 분석에 따르면 주소를 ‘해운대구광역시’로 쓴 공직자도 있다. 재산 합계가 맞지 않기도 한다.
공직자 주식 내역을 정리하면서도 문제점들을 발견했다. 종목명이 기상천외한 것이 많았다. ‘대우증권’ ‘LG상사’처럼 옛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은 봐줄 만했다. 채권을 상장주식으로 기재한 것도 그러려니 했다. 종목명 없이 ‘비상장주식 2주’ ‘코스닥 주식 1782주’로 기재한 것에 이르러서는 우롱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데이터를 다룰 때 듣는 경구 중 하나인 ‘less is more’(적은 것이 풍부하다)를 몸소 실천한 것일까.
누군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대충 입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계의 요구에도 공개 형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규정에 없어서’만은 아니라는 의심도 든다. 뜯어보지 말라, 감시의 대상이 되기 싫다는 속뜻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국회의원 정치자금 지출 내역은 엑셀로 작성했음이 뻔한데도 아예 문서를 스캔한 이미지 파일로 공개하기도 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시대의 오래된 농담 같은 풍경이다.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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