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치인 출판기념회’ 언제까지 그냥 놔둘 것인가
국제투명성기구가 지난 1월31일 ‘2022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를 발표했는데,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22위로 평가됐다. 이는 선진국 문턱을 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다. 특히 사회구조의 상층부인 정치권력이 낙후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돈 가뭄에 시달리는 정치인이 돌파구로 삼는 것이 ‘출판기념회’다. ‘책’을 매개로 지지자를 끌어모아 세를 과시하고, ‘책값’ 명목으로 비공식 ‘후원금’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음성화된 책값인 ‘봉투’다. 도서 정가는 1만~2만원 정도지만, 출판기념회에선 이보다 많은 금액을 내는 게 관례로 굳어져 있다. 현장에서는 봉투에 얼마를 넣어야 할지 고민하는 공무원과 기업인들이 자주 목격된다. 참석자 상당수가 책정가보다 몇 배나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일부는 뇌물성으로 여길 수 있는 거액을 보낸다.
어느 대선 예비후보 출판기념회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행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주차장에는 지역에서 상경한 전세버스가 여러 대 주차돼 있었다. 지역 지지자들까지 동원된 것으로 보였다. 행사장 입구엔 책 판매대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고 모두들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값이라고 볼 수 없는 두꺼운 봉투가 전달되고 심지어 신용카드 결제단말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행사장이 너무 복잡해 상당수 참석자는 자신의 이름을 쓴 돈봉투만 전달하고 발길을 돌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출판기념회에서 거액을 제공한 사람은 그 순간 해당 정치인과 암묵적 거래관계가 형성되고, 언젠가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게 돼 있다. 과거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침몰 등 초대형 참사들의 원인이 특정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총체적 비리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건설 현장이나 선박 운항에는 인허가를 포함한 상호관계가 존재하고 먹이사슬의 최고 상층부는 국회나 지방의회다. 국민의 대표가 공직을 수행함에 있어 정의롭지 못하면 그 파장은 확대돼 결국 문제가 발생한다.
출판기념회의 악습을 해결하기 위한 국회 차원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4년 12월에도 국회의원 153명의 명의로 ‘정치인 출판기념회 금지법안’이 발의됐지만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최근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정치인 출판기념회를 폐지하거나, 책값을 정가로 받게 하자’고 주장했다. 정치인 출판기념회가 공명정대한 선거를 저해한다고 본 것이다. 법적으로 정치인의 출판기념회 수익금은 모금 한도나 구체적인 내역의 공개 의무가 없는 게 문제다. 출판기념회를 빙자해 돈을 뜯고 이로 인해 부정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들은 퇴출시켜야 한다. 구태를 용인하면서 깨끗한 세상을 희망하는 것은 연목구어 격이다.
국회는 속히 출판기념회의 문제점 해결을 위한 입법을 추진해 대한민국 투명성을 높이기 바란다.
임한규 전 협성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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