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탄신일쯤 꽃 피우는 ‘이순신 나무’

기자 2023. 4. 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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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상스러운 봄, 대개의 경우 ‘충무공 탄신일’(4월28일) 즈음에 자잘한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식물분류학의 이름은 ‘왕후박나무’이지만, 아예 ‘이순신 나무’(사진)라고 부르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가 그 나무다.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단항마을 앞 바닷가에 서 있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용왕이 마을 어부에게 보내준 선물이다. 옛날 이 마을의 늙은 어부가 잡은 물고기의 배 속에 든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여서 그렇게 여겨왔다. 해마다 음력 3월10일이면 나무 앞에 모여 어부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리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11개로 갈라진 굵은 줄기가 8.6m 높이까지 솟아오른 이 나무는 가지를 동서로 21.2m, 남북으로 18.3m까지 펼쳤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다. ‘이순신 나무’라는 별명이 붙은 건 정유재란(1597)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마을에 잠복해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 그때 왜군에 비해 우리 전력이 적다고 판단한 장군은 대나무를 모아 쌓아놓고 불을 붙였다. 마디 속의 공기가 팽창해 터지면서 대나무는 대포 소리를 냈고, 먼 바다에서 우리 군의 사정을 엿보던 왜군은 그 소리에 주눅이 들어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자 장군은 병사들과 함께 이 나무 그늘에 모여 쉬면서 전열을 정비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원하는 마음으로 온갖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았으며, 이때부터 이 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 불렀다. 따지고 보면 나무와 이순신 장군의 인연은 고작 장군이 잠시 쉬어갔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잠시 쉬어갔다는 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큰 자랑이었기에 ‘이순신 나무’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바닷가 풍광에 어우러진 나무 모습만으로도 훌륭한 나무이지만, 그 깊은 줄기에 담긴 민족의 자존감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하는 큰 나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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