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탄신일쯤 꽃 피우는 ‘이순신 나무’
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상스러운 봄, 대개의 경우 ‘충무공 탄신일’(4월28일) 즈음에 자잘한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식물분류학의 이름은 ‘왕후박나무’이지만, 아예 ‘이순신 나무’(사진)라고 부르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가 그 나무다.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단항마을 앞 바닷가에 서 있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용왕이 마을 어부에게 보내준 선물이다. 옛날 이 마을의 늙은 어부가 잡은 물고기의 배 속에 든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여서 그렇게 여겨왔다. 해마다 음력 3월10일이면 나무 앞에 모여 어부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리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11개로 갈라진 굵은 줄기가 8.6m 높이까지 솟아오른 이 나무는 가지를 동서로 21.2m, 남북으로 18.3m까지 펼쳤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다. ‘이순신 나무’라는 별명이 붙은 건 정유재란(1597)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마을에 잠복해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 그때 왜군에 비해 우리 전력이 적다고 판단한 장군은 대나무를 모아 쌓아놓고 불을 붙였다. 마디 속의 공기가 팽창해 터지면서 대나무는 대포 소리를 냈고, 먼 바다에서 우리 군의 사정을 엿보던 왜군은 그 소리에 주눅이 들어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자 장군은 병사들과 함께 이 나무 그늘에 모여 쉬면서 전열을 정비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원하는 마음으로 온갖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았으며, 이때부터 이 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 불렀다. 따지고 보면 나무와 이순신 장군의 인연은 고작 장군이 잠시 쉬어갔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잠시 쉬어갔다는 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큰 자랑이었기에 ‘이순신 나무’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바닷가 풍광에 어우러진 나무 모습만으로도 훌륭한 나무이지만, 그 깊은 줄기에 담긴 민족의 자존감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하는 큰 나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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