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 사설] "좋은 질문입니다" AI 대변인 도입하는 게 어떤가
미디어오늘 1398호 사설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용산 대통령실 출입기자단 기자들이 관료를 상대로 한 브리핑 전문을 살펴보면 견고한 벽에 부딪혀 허우적대는 모습이 그려진다. 어떻게든 답변을 이끌어내려고 빠져나갈 수 없도록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데 대통령실이 내놓은 답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기자들이 묻고 관료가 답하는 브리핑은 창과 방패의 싸움 현장이라고 하는데 날카로운 창끝이 번번이 논점 일탈 화법에 막히면서 기자들이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지난 4월 11일 미국의 도청 의혹에 대해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낸 현장은 답답함 그 자체였다. 대통령실은 입장문을 통해 도청 의혹에 답을 내놨지만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 무엇을 부인하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이에 기자들은 문제가 된 유출 문건 진위와 관련 “해당 문건이 한국에 관한 내용이 있는 문건 1개인지, 복수인지” 사실관계를 물었지만 “지금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고, 이건 기본적으로 정보 사항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가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미 백악관이 도청된 문건의 유출을 인정했는데도 날조라고 한 대통령실 입장 차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묻자 “일부에서 우려되는 대로 과장내지는 조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이런 부분, 우선 팩트 문제를 확실하게 한 다음에, 그 다음에 후속조치를 평가하는 게 순서”라고 말했다. 입장차가 극명히 드러난 배경을 묻는데 또다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자는 도돌이표 답변이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다음 답변이다. 기자가 “어제까지는 사실관계 확인이 우선이라는 입장이 하루 만에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결론으로 바뀌었다. 그 구체적인 판단 근거는 무엇이고, 미국 측과는 어떤 소통과정이 있었는지, 그리고 문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말은 실제 도감청은 있었지만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것이고 소수는 내용이 일치한다, 이런 해석은 오해인지 설명 부탁드린다”며 '결정타'를 날렸지만 “아주 구체적인 질문이고 좋은 질문이다. 바로 그 점을 미국 법무부가 조사하고 있으니까 그 조사 결과가 나오면 조금 더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겠다”라고 답을 회피했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좋은 질문이다”라고 할 때마다 기자들이 한숨을 내쉬는 상황도 반복되고 있다. 지난 2월 26일 정순신 아들 학폭 의혹이 불거지고 대통령실 인사 검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졌다. 한 기자는 지난해 9월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공개된 공직 예비후보자 사전 질문서를 들어 “본인 배우자 또는 직계 존비속이 원피고 등으로 관계된 민사행정소송” 여부를 묻는 항목이 있는데도 학폭 의혹을 걸러내지 못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관계자는 “굉장히 좋은 질문이다”라며 “질문서에 학폭과 관련된 질문이 없다. 그러면 그걸 전혀 못 걸러 내느냐, 그걸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게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했다. 질문 항목에 나온 피소 여부만 잘 확인했어도 인사 검증 시스템이 작동했을 것이라는 게 질문 요지인데 아리송한 답을 내놓은 것이다.
지난 3월14일 기자가 “노동시장 유연화 할 경우에 취지는 좋지만 사업주들이 악용을 해서 장기간 연속 근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하고 노동자 보호장치에 대해 묻자 관계자는 “아주 좋은 질문”이라며 “노동 약자들이 걱정하는 것 중에는 예를 들어서 포괄임금이죠, 일은 시키고 수당은 안 주는 것 아니냐, 그리고 말은 한달 간 휴가를 보내준다고 하지만 우리가 직장 다니는 현실에서 그게 과연 가능한거냐, 이런 부분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오히려 반문하면서 이미 지적한 현 상황만 강조할뿐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대통령실 출입 한 기자는 “당국자가 TV화면에서 공식 입장을 밝히면 기자들은 어떻게든 입장에 대한 배경과 사실관계를 파악하려 하는데 좋은 질문이라면서 피하기 일쑤”라며 “일종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회피성 답을 내놓는 것 같다. 전혀 궁금증이 해소되질 않는다. 반복되는 행태에 기자들도 물어봐야 같은 소리하는데라는 하소연이 많다”고 전했다.
현장 기자들 답답함을 허투루 넘길 게 아니다. 기자들 사기를 꺾고 질문의힘을 무력화시키는 걸 의도했다면 성공일지 몰라도 대국민 소통 서비스 차원으로 보면 최악에 가깝다. 이럴거면 차라리 AI대변인을 도입해 '좋은 질문입니다'라는 소리를 듣는 게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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