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만 없는 '그림자 아이들' [책방지기의 서가]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서류로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분명 한국에서 태어났고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이 있지만 서류가 없어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미등록 이주아동이다. '있지만 없는 아이들: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의 제목이 보여주듯 미등록 이주아동은 있지만 없다. 이 책은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본인 명의의 핸드폰 개통이 어렵고, 청와대에 견학을 가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봉사 사이트 1365자원봉사포털에 가입하지 못하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티켓 예매 사이트 회원가입이 안 되니까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가지 못한다. 우르르 몰려가 떡볶이를 먹고 친구들이 n분의 1로 '계좌이체'를 할 때 주섬주섬 현금을 꺼내야 한다. 국민국가에서 신분증 없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기 명의의 통장 없이 과연 살 수 있을까."
신분증 없이, 자기 명의 통장 없이 살아가는 책방 손님 K는 토요일마다 책방에서 진행하는 수업에 참여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낯가리지 않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았던 일, 동생과 싸워 속상한 일 등 자기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들려주곤 했다. K는 엄마랑 동생 둘이랑 산다. 엄마는 베트남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 아빠는 없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한국인 친구들과 놀고 한국어로 만든 노래를 부르지만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 속인주의를 채택한 한국에선 한국에서 태어났어도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라야 한국인으로 인정받는다. 다양한 난생설화를 갖고 있는 땅이건만 부모 혈통을 확인해야 한국인으로 인정받는다. 난생설화라는 게 부모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부모가 누군지 몰라도 국경을 넘어와 이 땅에 기여하면서 살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게 우리 역사다. 오래된 난생설화를 버리고 터무니없는 단일민족의 신화로 우리 법체계까지 오염시켜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고생이다.
국가는 K에게 엄격하지만 민간단체가 애써서 이런저런 기회를 주곤 한다. K는 2021년 5월 어린이날을 맞아 이주민지원 단체를 통해 제주도 여행 기회를 갖게 되었다. 참가 신청서를 쓰는데 주민등록번호를 써야 했다. K에겐 등록번호가 없다. 주민등록번호, 여권번호, 외국인등록번호 같은 자기 존재를 서류로 증명할 수 없는 번호를 받지 못했다. 서류에 주민등록번호를 쓸 수 없어 신청서를 제출하지 못했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갈 수 있다는 기대는 무너졌다. 초등학교 1학년 K는 자기에게 등록번호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직 잘 모른다. 눈물이 나지만 왜 울어야 하는지 모른다. 아이가 울지만 어떤 어른도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어린이날에 제주도에 못 간 K가 어버이날에 엄마에게 쓴 카드 내용이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제주도는 못 가 아쉬(쉽)지만, 다음 여행에는 가고 싶어요."
작가 은유는 국가인권위원회 지원으로 K 같은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마리나, 페버, 김민혁, 카림, 달리아가 전하는 목소리가 활자를 타고 들린다. 미등록 이주아동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 이주인권활동가가 전해 주는 전문가 견해도 소개한다. 다행히 미등록 이주아동들도 고등학교까지 학교를 다닐 순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의거해 학습권은 보장받는 것이다. 학습권이 있지만 생활권이 없는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이다. 미등록 이주아동들도 모두 우리 아이들이다.
저출생 현상 때문에 장차 국가소멸을 염려하는 때,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마저 국적을 취득할 방법이 없는 건 어리석다. 더 많이 태어나게 할 궁리를 하면서 이미 태어난 아이를 인정하지 않는 건 모순이다. "영국은 부모가 모두 외국인이어도 아동이 만 10세 이상 만 18세 이하이고 태어난 후 10년간 영국에서 거주하면 부모의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국적 취득 기회를 준다."
K는 지금 3학년이다. 여전히 등록번호가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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