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명의도용 땐 빚 안 갚아도’ 판결…금융사 책임 강화?
최근 1·2심서 금융기관 ‘책임 강화’ 판결
대출 피해자 구제 길 넓어질까 귀추 주목
금융기관이 본인 확인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명의를 도용당한 이에게 대출을 해줬다면 대출금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그동안은 명의 도용으로 대출이 발생했어도 금융기관이 공인인증서 등 금융감독 당국이 인정한 확인 수단을 적용했다면 ‘명의자가 갚아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였다. 하지만 금융기관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하급심 판결이 잇따르면서 명의 도용 대출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고등법원 제34-3민사부(재판장 권혁중)는 금융기관 오릭스캐피탈코리아(오릭스)가 대출모집인으로부터 명의를 도용당해 전세자금 2억원을 빚진 ㄱ(33)씨를 상대로 낸 ‘대출금 반환 소송’에서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24일 밝혔다. 재판부는 “금융기관은 전세자금 대출 실행 이전에 고객에게 본인 여부, 대출계약의 중요 사항 등을 직접 확인해야 하는데 오릭스는 대출모집인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해 ‘네’ ‘아니요’ 등 형식적인 확인을 구하거나 서류 심사만으로 대출을 승인했다”며 “금융실명법상 본인 확인 의무와 대출모집인을 사용할 때 지켜야 할 금융기관으로서의 주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학 졸업 뒤 개인 사업을 하던 ㄱ씨는 2019년 고등학교 동창 소개로 대출모집인을 알게 됐다. 대출모집인은 ‘현재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인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건설회사와 제휴를 맺었다. 2억2천만원을 대출받아 전세 계약을 맺으면 전세 계약 만료일에 시장가의 70%로 매입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대출을 제안했다. 이후 차익 30% 가운데 10%를 대출모집인에게 주면 되고, 전세대출 2억2천만원에 대한 이자도 대출모집인 쪽에서 부담한다고 했다. 집 겸 사무공간이 필요했던 ㄱ씨는 대출모집인의 말을 믿고 도장, 신분증, 통장 등을 넘기고 경기도 한 아파트에 전세 입주했다.
문제는 대출모집인이 ㄱ씨의 명의로 대출한 게 1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ㄱ씨 이름으로 일주일 뒤 오릭스로부터 2억원가량을 또 대출받았다. 전세 계약서, 임대인 명의 확인서, 전세자금 대출 약정서 등 대출 서류는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명의를 도용해 오릭스와 신한캐피탈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153억원을 대출받았다.
오릭스 등은 명의 도용 피해자들에게 대출금을 갚으라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명백한 명의 도용 피해자였지만 1심 법원은 ㄱ씨가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오릭스가 명의 도용 대출까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금융기관이 좀 더 엄밀하게 본인 확인을 했어야 한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처럼 명의 도용 사건에서 금융기관의 ‘본인 확인 의무’를 엄격히 해석해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는 1·2심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2021년 지인에게 명의 도용을 당해 현대캐피탈로부터 8천만원의 빚을 진 ㄴ씨가 제기한 채무확인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93단독 김대원 판사는 “영업 편의를 위해 절차를 간이하게(쉽게) 해 발생하는 위험은 원칙적으로 현대캐피탈이 부담해야 한다”며 ㄴ씨 손을 들어줬다. 마찬가지로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 제4민사부(재판장 강재철)는 명의 도용 피해자가 카카오뱅크를 상대로 제기한 채무확인 항소심에서 “대출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다.
법조계에선 이런 하급심 판결이 사기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카카오뱅크 사건 피해자를 대리한 김남희 변호사는 “비대면 금융거래 등의 활성화로 명의 도용 피해자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며 “금융기관의 주의 의무를 엄격하게 인정한 판결은 명의 도용 거래의 효력을 쉽게 인정했던 기존 판결들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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