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시간 근로제도와 침체, 그리고 대공황의 교훈
외환위기 시절 전통적 고용책 화근
주 69시간 근로시간 연장 신중해야
정부가 경제정책을 선제적으로 추진하지 못하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각오해야 한다. 경기가 연착륙이 아닌 경착륙이 됐을 땐 모든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진 채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경기침체가 깊어지고 있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뭘까.
■ 미국의 경기침체=불확실성이 커져가는 세계 경제에서 가장 확실한 것 중 하나는 경기침체다. 미국 메이저 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브라이언 모이니핸 CEO는 4월 셋째주 1분기 실적을 공개하며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완만한 경기침체를 가리키고 있다"고 리세션을 언급했다.
모이니핸 CEO는 "아직 경기침체가 소비자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관측되지 않고 있지만, 결국 소비자들은 더 신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완만한'이란 표현은 지난 3월 미국 은행들의 연쇄 파산이 크레디트스위스(CS)로까지 번지면서 높아졌던 우려에 비하면 완만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5월 2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앞두고 19일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공개한 경기동향 보고서인 베이지북은 "미국 제조업이 공급망 체계가 지속적으로 나아지고 있는데도 정체 혹은 하락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비지출이 하락세를 보이는 부분도 지적했다. 이렇게 미국이 경기침체의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베이지북은 "제품 가격은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경기침체는 이제 언제 시작되는지, 또 얼마나 가혹할지를 둘러싼 의견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연준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후 경기후퇴에 대응한다며 시중에 달러를 뿌렸다.
연준은 시중의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늘리는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했다. 2020년 3월 연준의 자산 규모(유동성 규모)는 4조2000억 달러 수준이었는데, 그해 5월엔 7조 달러를 넘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22년 5월 연준의 자산 규모는 8조9000억 달러대를 기록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2021년 말 시중 유동성이 급증하며 물가가 위험해지자 양적긴축과 기준금리 인상을 선언했다. 하지만 판단을 다소 늦게 내리면서, 가파른 금리인상이란 무리한 정책을 썼고, 결국 이는 지난 3월 미국 지역은행들이 자금경색으로 파산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다행히 지금까진 CS 이후 자금경색으로 무너진 은행이 없어 미국발 은행 위기는 사실상 종료하는 분위기다.
다만, 경기침체는 피하기 힘들어졌다. 23일 다우존스의 온라인 경제매체 마켓워치는 "미국 금융계가 경기침체 시점을 찾기 위해서 샴 법칙, 블랜치플라워-브리슨 법칙과 같은 선행지표를 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샴 법칙은 노동시장이 약세를 보이는 것과 정부가 경기부양에 나서는 시점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실업률이 최근 12개월 최저치보다 0.50%포인트 상승하면, 정부가 경기부양책으로 현금을 살포한다는 법칙이다. 최근 수치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평균 실업률이 3.4%(올해 1월‧지난 12개월 최저치)보다 0.5%포인트 높은 3.9%까지 올라야 침체기에 진입한 것이란 의미다.
블랜치플라워-브리슨 법칙의 골자는 '사람들이 나쁜 시기가 올 거라고 생각하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소비자신뢰지수 등으로 파악한다. 미국과 함께 금리인상에 동참해야 했던 연관 국가들에게도 경기침체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 경착륙과 연착륙=실물경제에서는 경착륙과 연착륙에 따라 고통의 수준이 다르다. 양적긴축과 금리인상은 투자를 위축시키고, 생산을 줄이면서 실물경제로 번져나간다. 실물경제에서 실업이 증가하면, 소비가 감소하고 이는 경제성장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경착륙으로 인해 대량실업이 발생하고, 소비가 실종하는 수준까지 다다르면 고통이 커지고 회복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미국의 대공황이 그 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크게 후퇴했다. 이때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히는 임금유지정책을 펼쳤는데, 이게 대량실업으로 이어졌다. 대공황 시기에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후버 행정부의 요구대로 임금을 삭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대공황 초기 유지되던 임금은 1931년 US스틸이 임금을 본격적으로 하향조정하면서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후버 행정부는 1929년부터 1931년까지 2년간 명목임금을 유지시키면서 결과적으로 물가를 고려한 실질임금을 17%나 끌어올렸다. 불황에 실질임금까지 상승하자 실업률이 고공행진할 수밖에 없었고, 초기 대응의 문제로 20%대에 달하던 미국의 실업률은 1940년대까지 15%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결과론적으로 미국은 노동시장이 제때 회복하지 못하면서, 지긋지긋한 불황의 시대를 보내야 했다.
■ 고용, 회복의 열쇠=물론 대공황 시기를 지금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정부출연연구소인 한국노동연구원의 2010년 '경제위기와 고용 정책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도 최저임금제도가 있었는데, 여성과 아동만 적용받았다. 대공황 시기와 지금을 직접 비교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에서도 고용은 결과를 결정하는 핵심 사항이었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대량실업과 함께 실질임금의 하락까지 동반했다. 금융회사 28.8%가 퇴출 혹은 합병된 금융계는 타격이 특히 심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금융회사 종사자수는 1997년 31만7623명에서 1998년 21만8726명으로 31.3%나 급감했다. 실질임금 수준도 1년만에 10%나 감소했다.
상대빈곤율은 1997년 9.3%에서 12.2%로 커졌는데, 전체 빈곤인구의 7.3%가 실직 등 고용사정의 변동으로 발생했다. 실업이 집중된 40대와 50대가 직장으로 복귀하지 못한 결과, 그 이후 실업률이 낮아져도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지 않는 상태가 장기간 이어졌다.
외환위기 당시 산업정책은 전통적인 고용창출형이였다. 신규고용을 창출하고, 실업자를 대상으로 직업훈련을 꾀한 게 대표적이다. 실제로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벤처 창업붐이 일어나 3년 만에 고용 숫자를 30만명 이상 늘리기도 했다.
한국은 1999년 10.8%의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실물경제의 고통이 너무 심했다. 이런 경제 재편을 주문한 국제통화기금(IMF)도 2003년 7월 'IMF와 최근 자본계정위기: 인도네시아, 한국, 브라질'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일부 실책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실제로 IMF는 구제금융과 정책으로 한국의 1998년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실제로는 –6.7%로 경착륙했다.
2008년 금융위기 대응책으로 이명박 정부는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를 지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고용노동부는 2012년 52시간제에서 연장근로 한도인 12시간을 산정할 때 휴일근로를 포함하지 않았던 관행을 고쳐 근로시간을 사실상 단축하는 '일감‧일자리 나누기'로 대응했다. 일자리 나누기 정책은 이후에도 이어졌고, 정부는 2018년 대기업부터 52시간 근로제를 시행해 2021년에는 5인 이상 사업장에서도 52시간 근로제가 적용됐다.
윤석열 행정부가 다시 추진 중인 69시간 근로시간 연장 제도는 경기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조심히 다뤄야 할 정책이다. 근로시간을 쉽게 늘릴 수 있는 정책이 시행되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어 과거 경제위기에서처럼 실업과 소비감소로 이어지는 경착륙의 악순환이 형성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져서다.
현재 법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판례로만 인정되는 포괄임금체계를 주요 국가들처럼 임금 수준, 업종 등에 따라 차이를 주는 방식으로 미세하게 운용하는 것을 포함해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한 여러 대안을 먼저 점검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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