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고 춤추는 여성들의 모임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4월16일 세월호 참사 9주기가 다가오자 마음이 무거웠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어디까지 왔나, 지금 참여해야 할 캠페인은 뭘까, 찾아봐야지 했는데 하루하루 바쁘기만 했다. 그러던 중에 안산 단원고 희생자 엄마들로 이뤄진 연극팀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장기자랑>이 개봉됐고, 흥행이 부진해서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들과 극장으로 갔다.
객석에 앉으면서 나도 모르게 몸을 가지런히 했다. 슬픔과 예우가 있어야 하는 공간에 들어가려면 갖춰야 할 규칙인 양 몸이 긴장했다. 그런데 영화에서 ‘엄마들’은 똥머리를 하고,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을 입고, 까탈레나 춤을 추고, 욕을 하고, 랩을 했다. 밤늦도록 연기 연습을 하고,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되기 위해 의상을 구한다.
“누가 보면 (참사 뒤) 춤추고 노래하고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겠지만 나는 이걸 더 잘하고 싶어.” 희생자 가족인 ‘영만 엄마’이면서 배우 ‘이미경’이기도 한 분의 말을 듣고 나는 바짝 모은 팔, 붙이고 조였던 무릎을 풀어버렸다. 애도와 연대를 위해 극장을 찾았던 나와 친구들은 점점 다른 관객들과 함께 울고 빵 터지고, 박장대소하며 예술의 관객이 됐다.
‘피해자다움’이 떠올랐다. 피해자다움은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기준이다. 법적 판단에서 필수적인 요소라는 주장도 있고, 성차별적 통념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라는 비판도 있다. 법적 판단에서든 사회적 인정에서든 피해자다움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재해와 재해 피해자를 규정할 때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피해자다움’은 먼저 당사자인가 아닌가를 가린다.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지 제한하는 것이다. 자격을 부여한 다음엔 전형적으로 피해자 같은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이 전형성이 확인돼야 진짜 피해자가 맞다고 인정한다.
피해 보상,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최소화하려는 국가 권력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고, 좁게 적용한다. 최근에는 ‘약자 혐오’를 확산하는 세력이 재난 피해자를 모욕하거나 수치스럽게 하면서 피해 회복 공공시스템을 와해하려고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피해자다움은 여기에만 있지 않다. 피해자를 피해자로서 예우하고, 당사자가 겪는 좌절과 슬픔을 우선 존중하려는 이들도 피해자를 단일한 집단으로만 떠올리고, 피해자는 이럴 거야 하고 감정과 상황을 납작하게 짐작하고 고착화하면, 그 역시도 피해자다움이라는 거대한 관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일 수 있다. 피해자와 나 사이 거리가 고정되면 함께 해볼 수 있는 게 줄어든다.
영화 주인공인 엄마들이자 극단 배우들은 성격도 다르고 가족관계, 경제적 상황도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연극 무대에서 한 작품을 같이 한다. 재난 희생자 가족, 그것도 여성에게 부여되는 규범이 있지만, 배우들은 각기 다른 배역으로 변신함으로써 세월호를 알린다. 배우가 돼가는 중 급기야 주연 배역 쟁탈전도 생겼다. 욕망을 드러내고, 부딪히고, 갈등을 불사하다가 다시 무대에서 만났을 때, 전국 방방곡곡 시민들을 만나 공연하는 팀이 된다.
김정희원은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이 사회가 나에게 가하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오히려 이 사회에 헌신해야 한다는 점이 바로 소수자들이 겪는 가장 큰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이미 지쳐 있는 사람들의 사회 변화 운동이 다시 지친 상태로 가능할까? 저자는 자기돌봄과 공동체를 향한 돌봄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하며 “나의 회복이 곧 모두의 회복인, 연대를 위한, 동지가 되기 위한 돌봄”인 ‘급진적 자기돌봄’을 제안한다.
선의의 피해자다움에 기반한 질문을 나도 자주 듣는다. “성폭력 상담소에서 일하다 보면 어둡고 힘들지 않아요?” 여성폭력 근절 운동은 지친 사람들이 더 지치게 하는 활동이라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성차별적 성폭력 현장에서 얻게 된 급진적 서로돌봄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큰 힘이다. 함께 투쟁하고 함께 춤추는 이들은 가장 깊이 나와 타인을 연결해준다. 5월에는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 급진적 서로돌봄이 펼쳐진다. 정상가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5월에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시위를 더 힘차게 열면서도,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마련하고 운영하는 춤테라피 움직임 워크숍이 시작된다. 투쟁하고 춤추는 사람들의 모임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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