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감시하는 공중화장실이라니
[숨&결]
[숨&결]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나에겐 ‘공중화장실 다니는 기술’이 몇가지 있다. 기술 1번은 ‘전화하며 들어가기’다. 톤이 높은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던 여성이 화장실로 들어오는 날 보고 흠칫하다가도, 이런 내 목소리를 들으면 이내 안심한다. 두번째는 ‘혼잣말하기’다. 화장실로 들어가며 “화장실에~ 빈칸이~ 어디 있나~”와 같은 곡조를 읊조리면 높은 확률로 의심받지 않고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여성이다. 지정성별도 여성이고, 생식기의 형태도 여성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화장실을 이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기술을 익혀야 했던 이유는 단지 키가 크고 머리가 짧은 여성이라는 점 하나 때문이었다. 유난이 아니라, 화장실에 얽힌 에피소드를 얘기하자면 천일야화 못지않다. 화장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간 여성분부터 고속도로 휴게소 여자화장실을 이용하려는 나를 쫓아와 화장실 문까지 열어젖힌 할머니까지. 나에게 공중화장실 이용은, 문 열고 들어가서 용변을 보고 나와서 손을 씻고 ‘여자화장실’이라고 쓰인 문을 나설 때까지 모든 절차가 긴장의 연속이다.
지난 20일, 서울교통공사가 올해 6월 말부터 서울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 여자화장실에 인공지능(AI) 기반 성별 분석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언론 보도를 보면, 서울교통공사가 자체 개발한 이 인공지능 기반 성별 분석 프로그램은 체형·옷차림·소지품·행동 등 패턴 분석과 학습을 통해 “가발을 쓰고 있어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단다. 인공지능이 여성이 아닌 자가 화장실에 출입한 것을 식별하면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팝업으로 띄우고, 안내방송을 송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지난해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재발 방지 대책 중 하나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읽으며 허망함에 사로잡혔다. 수많은 오해와 고초를 겪고 각고의 노력 끝에 공중화장실 다니는 기술을 익혔는데, 곧 신묘한 인공지능에 가로막혀 출입조차 하지 못할 신세가 된다니 기가 막혔다. 수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수십만명의 여성을 봐왔을 할머니조차 나를 남자로 알고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인공지능이 무슨 수로 나를 남자가 아닌 여자로 판명할 수 있겠는가? 평소에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 나이키 스니커즈, 모자를 즐겨 쓰고 팔자걸음이 다소 심한, 키 170㎝인 나를 여성으로 감지해낼 수 있을까? 동행에게 부탁해 같은 여성임을 어필할 수 있도록 화장실에 함께 가달라고 부탁하면, 인공지능이 나를 동성 일행이라 판단할 수 있을까? 용변이 급해서 화장실로 뛰어가는데 인공지능이 “남성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지려야 하나 혹은 남자화장실로 달려가야 하나. 온갖 우려가 머릿속을 맴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성별 감지 시스템은 새로운 기술을 통한 여성 안전의 확보라는 목적에 얼핏 부합해 보이지만, 계기가 된 살인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보면 재발 방지 대책과는 거리가 멀다. 신당역 살인사건은 전조 범죄가 있었던 가해자로부터 피해자 보호 미흡과 역내 안전을 점검하고 확인할 인력의 부족 등이 이유로 꼽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확인할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지울 수 없다. 인공지능을 학습시킬 ‘여성’의 범위를 사회 규범에 따라 어디까지 규정하고 데이터화할 것이냐는 얘기다. 여성의 신체정보 수집과 관련해 프라이버시도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여성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이 될 수도 있다.
한땐 선진국에서 보편화하고 있는, 다양한 성정체성 등을 고려한 다양성(성중립) 화장실 같은 게 한국에도 설치되면 마음 놓고 화장실을 갈 수 있겠거니 기대했던 적도 있더랬다. 그런데 등장한 것이 인공지능이 감시하는 여자화장실이라니. 모두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화장실은커녕 인공지능마저 홀릴 새로운 공중화장실 이용 기술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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