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초등생에 대학생 수준 글 보여준 셈”… ‘그들’만 아는 판결문 [심층기획]

유경민 2023. 4. 2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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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 먼 ‘쉬운 판결문’ 도입
국민 60% “법률 용어·문장 이해 어려워”
변호인 없는 ‘나홀로 소송’ 대응에 한계
소득·학력수준 낮을수록 어려움 더 커
결국 수백만원 수임료 내고 변호사 선임
2022년 삽화 그려 넣은 판결문 첫 사례로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설명도
법조계 “‘쉽다’의 기준 규정 등 모호”
신청자에 요약 서비스 도입 목소리도

“원고의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33년째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김상원(55·가명)씨는 지난해 8월 법원으로부터 자신의 민사소송 결과가 담긴 판결문을 받았다. 김씨는 “창피한 말이지만 솔직히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승소’ ‘기각’ 같은 법률 용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한 보험회사는 2020년 김씨의 이혼한 아내가 필요한 날보다 더 오래 병원에 입원해 보험금을 부정 수급했다며 김씨에게 3억여원을 물어내라고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보험회사 측의 주장을 일부 인정해 김씨에게 1400여만원과 이자를 물어내라고 판결했다.

김씨는 자신이 왜 졌는지 알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판결문의 내용을 이해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씨는 “벽돌 몇장 나르는 것에 대해서만 알지 법에 대해 어떻게 알겠나”라며 “초등학생에게 대학생 수준의 글을 보여준 것”이라고 토로했다.
부동산 사기, 상속 문제 등 민사소송만 10여 차례 경험했다는 신모(73)씨는 일반적인 국어 실력으로 읽기엔 판결문이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매번 소송을 진행할 때마다 수십만원에서 100만원 가까이 하는 수임료를 내고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신씨는 “사실관계는 알고 있으니 법률적 지식이 부족해도 다음번 소송은 혼자 진행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판결문을 읽어봐도 결과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변호사도 2심 때 계속 선임하겠다고 해야 알기 쉽게 설명해줬다”고 호소했다.

◆지난해 민사사건 10건 중 7건은 원·피고 모두 나 홀로 소송

24일 대법원이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민사사건 10건 중 7건(68.1%)은 원고나 피고 모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나홀로 소송’이었다. 원고와 피고 모두가 변호사를 선임한 쌍방선임은 전체의 10.3%에 그쳤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소송 당사자들의 경우 김씨 사례처럼 자신이 받은 판결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사건 당사자가 장애인, 미성년자, 노인 등일 경우에는 이 같은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더 높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대표는 “(소송의) 승패만 알고 판결의 구체적 내용을 몰라서 대응하지 못하는 사례를 보면 안타깝다”며 “간혹 재판에서 다 지고 와서 판결을 뒤집고 싶다고 하는데 그간의 판결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법제연구원이 2021년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6명은 법률 용어와 문장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법률 용어·문장을 이해하기 쉽다는 응답은 각각 9.7%, 10.4%에 그쳤다. 소득 수준과 학력 수준이 낮을수록 법률 용어·문장을 이해하는 데 더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력별로 ‘법률 용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답변을 한 비율을 보면 중학교 졸업(중졸) 이하의 경우 72.1%, 대학교 졸업(대졸) 이상의 경우 53%로 20% 가까이 차이가 났다.

월 소득별로 같은 응답을 한 비율은 100만원 미만(76.4%), 100만~200만원 미만(66.4%), 200만~300만원 미만(61.1%), 300만~400만원 미만(55.4%), 400만~500만원 미만(60.4%), 500만원 이상(55.8%)이다. 한국법제연구원은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지역 규모가 작아질수록 법률 용어와 문장에 대한 접근성도 낮아진다”며 “어려운 표현과 문장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문체로의 전환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조언했다.
◆“국민 권리 위한 ‘쉬운 판결문’ 도입돼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판결문을 쉽게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판사 출신인 이인석 변호사(법무법인 광장)는 “(당사자들이) 판결문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그 내용에 따를지, 불복하고 항소할지 결정할 수 있다”며 “국민이 자기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하려면 쉬운 판결문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신안 염전 노예 사건 등 공익 사건을 대리해 온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장애인 차별중지 소송을 진행하면서 사건 당사자인 장애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판결문이 작성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법원에서는 ‘쉬운 판결문’의 첫 사례가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 강우찬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12쪽짜리 판결문 중 4쪽을 판결의 내용을 쉽게 풀어쓰는 데 할애했다. 청각장애인 A씨가 서울 강동구청장을 상대로 낸 장애인일자리 사업 불합격 처분 소송의 판결문이었다.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 달라”는 A씨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A씨는 이 사건 소송에서 면접 당시 수어 통역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며, 수어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타 면접자들과 동일한 면접 시간을 배분받은 것은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쓰고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강 판사는 그림과 함께 A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3명의 사람이 모두 같은 높이의 발판을 딛고 선 그림과 키에 따라 다른 높이의 발판을 딛고 선 그림 두 가지를 제시한 뒤, A씨가 겪은 상황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면접 상황을 재연해본 결과, A씨에게 주어진 20분의 면접 시간이 5개의 질문과 답변을 하는 데 부족한 시간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A씨의 상황을 “발 받침대의 높이가 모두 같지만 세 사람 모두 경기를 관람하는 데에는 장애가 없는 높이인 경우”라고 풀이했다.

법조계에서는 신청자에 한해 판결문을 ‘구술’로 설명해주거나 주문이나 근거를 쉬운 말로 짧게 요약해주는 서비스를 도입하자는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판사가 쉬운 판결문을 추가로 쓰면 법적 효력을 가진 문서가 2개 존재하게 되는 문제가 있고 ‘쉽다’의 기준도 규정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며 “판사가 쓴 판결문의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는 전문 인력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유경민·안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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