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에 20여년 앞서···‘인권 해방은 근본 사명’ 부르짖은 형평사
백정들이 쓰는 저울의 상징성 이용
평등 사회와 인권 증진 목표 설정
식민 착취 비판한 일본 수평사와
끊임 없이 교류·협력 모색하기도
“백정! 백정! 부합리의 대명사, 부자연의 대명사, 모욕의 별명, 학대의 별명인 백정이라는 명칭하에서 인권의 유린, 경제의 착취, 지식의 낙오, 도덕의 결함을 당하야 왔다.” 전북 김제 서광회가 1923년 5월20일 창립 발기회에서 채택한 선전문 중 일부다. 서광회는 그해 4월25일 창립한 경남 진주 형평사에 부응해 결성한 단체다. 나중 형평사 김제 분사로 이름을 바꿨다.
형평운동 연구 권위자인 김중섭(경상대 교수)은 세계인권선언(1948년)보다 25년 앞서 ‘인권’이라는 말을 쓴 점을 높이 평가하며 “정말 근사한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2016년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영국 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형평운동에 관해 쓰려 하자 한국 교수에게 ‘왜 하필이면 백정 얘기하려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전하며 이렇게 밝혔다. “영국에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형평운동을 아주 높게 평가해주는 겁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2차 세계대전 끝나고 유엔에서 인권선언을 하면서 정립됐는데 그보다 20여년 먼저 ‘인권’과 ‘권리’라는 단어를 썼다는 데서 더 그랬죠.”
세계인권선언보다 25년 앞선 ‘인권’
김중섭은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24일 열린 제49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학술회 ‘형평운동의 발자취: 평가와 현대적 함의’ 중 발표한 ‘형평운동과 인권, 그리고 사회적 연대’에서도 서광회 선전문을 인용했다. 그는 “백정들의 상용 도구인 저울의 상징성을 이용하여 저울과 같은 평등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 형평사의 목표였다”고 했다. 이 목표를 위해 여러 지역에서 결의가 이어졌다.
이듬해인 1924년 2월10일과 11일 부산에서 열린 ‘전조선 임시총회’에서는 “종래 불합리한 계급의식에 의하여 인권유린적 행동을 하는 시(時)는 전 사원은 결속하여 차(此)에 최후까지 대항”하겠다고 결의했다.
1926년 “인생은 천부불가침의 자유가 있다. 인격과 자유를 억압된 자에게 어찌 생의 의의가 있으랴!” 등 ‘형평사 선언’과 ‘인권 해방을 근본적 사명으로 함’ 등 ‘형평사 강령’이 나온다. 김중섭은 “인권 보장과 증진이라는 목표를 뚜렷하게 설정하였다. 그러한 인권운동 성격은 1926년에 채택한 형평사 선언과 강령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는 “형평사 선언에 반영된 인권 인식은 19세기 말부터 조선 사회에 널리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 문물의 영향, 그리고 전통 사상을 재해석하며 사람의 가치를 하늘과 같다고 본 동학사상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차별 철폐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최초의 반대활동은 형평사가 창립된 진주에서 1924년 4월13일 발생했다. 주민들이 형평사원들에게 집단폭력을 행사하고 수육 불매운동을 펼치며 사원들의 경제활동을 방해했다. 지역 사회 단체에 형평사와의 단절을 요구하는 집단적인 반대활동을 벌였다.
차별에 근거한 반대는 효과가 없었다. 형평사는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의 협력과 연대로 합리적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방안을 내며 발전해나갔다. 김중섭은 “1920년대 후반기에 형평사의 인권 인식은 더욱 발전하여 인생권과 생활권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는 것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일본 부르주아지 지배하 조선형평사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형평사 창립 초기부터 연대했다. 북성회는 기관지 <척후대>를 통해 여러 차례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 자본주의 불공평한 사회를 파괴하고 사회주의 형평한 사회를 건설하기까지 그 대운동이 진보하야 가기를 바래고 비오며 이에 붓을 멈추노라.”(<척후대> 3호, 1923년)
사회운동과의 연대는 내부 갈등도 촉발한다. 노장층의 온건세력과 소장층의 진보세력이 대립했다. 김중섭은 “형평사원들이 전통 산업에서 누리던 기득권의 유지를 중시하는 입장과 계급 해방 중심의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입장으로 갈렸다”고 했다. 주도권은 집단이익을 강조하는 세력에게로 넘어갔다. 김중섭은 “1935년 4월 대동사로 개칭하며 이익집단으로 전락했다”고 했다.
형평운동 역사에서 일본과의 연대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은 형평운동에 영향을 준 수평운동의 근원지다. 이날 아사지 다케시(오사카인권박물관)가 ‘형평사와 수평사의 교류와 연대’를 발표했다. 형평사와 수평사가 교류한 기록은 2016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수평사는 ‘1871년 8월28일 신분이 폐지되고도 새로운 형태의 차별을 받게 된 에타(穢多) 신분의 부라쿠민(部落民)이 차별을 극복하고 해방을 실현하려 조직한 사회운동 단체’다. 수평사 운동은 처음 “인류애를 바탕으로 해외 피차별 마이너리티와의 국제연대를 구체화하려는 것”이었다.
아사지 다케시의 발표문을 보면, 수평사는 형평사 창립 전에는 여러 차례 독립운동에 지지·연대 의사를 표했다. 1923년 3월2일엔 “조선의 독립운동과의 연락에 의해 수평운동의 국제화”를 도모한다. 조선인해방운동을 표방한 간사이조선인연맹과도 연대했다.
형평사 창립 이후엔 일본 공산당원인 사노 마나부가 1923년 7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대한 극비 보고에서 “(형평운동은) 조선 공산주의자의 지도로 서야 할 것”이라며 기대를 표명했다. 또 일본 공산당원이자 전국수평사청년동맹의 이론적 지도자인 다카하시 사다키도 “우리와 조건이 같은 조선의 백정이 작년에 형평사 운동을 일으킨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피착취자를 현재의 노예적 지위에 두고, 영구적인 착취와 지배를 얻으려는 지배계급의 간책(奸策)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은 계급투쟁의 공동전선에 설 수 있도록 통일되어야 한다”고 했다.
1924년 3월 교토시에서 열린 전국수평사 제3회 대회에서는 ‘조선의 형평운동과 연락을 도모하는 건’이 제안된다. 그 뒤로도 수년간 연대와 지지 발언이 이어진다.
1928년 4월 형평사 제6회 대회 때 경성으로 온 수평사 내빈 도쿠나와 신지가 “천황폐하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평사원과 형평사원이 서로 손을 잡아 함께 일본제국 국세를 전 세계에 발휘하도록 노력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라며 천황제 승인을 전제로 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무비판적인 축사를 해 항의를 받고는 용서를 빈 일도 있었다.
1928년 5월 전국수평사 제7회 대회에 ‘조선 형평사 제휴의 건’이 제안된다. “조선의 모든 인민은 일본 제국주의 국가의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매를 맞으며 비참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백정이라는 이름으로 가속도적으로 3중이나 4중으로 압박받고, 완전히 노예 생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이 의안문은 결론적으로 “일본 부르주아지의 지배하에 있는 조선 형평사와 완고한 제휴 없이는 완전한 해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권 문제와 경제 문제는 함께 해결할 과제이자 목표
아사지 다케시는 ‘조선 형평사 제휴의 건’은 식민지 독립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본관헌(내무성 경보국 도서과와 각 부현 특별고등경찰과)의 검열을 거쳐 먹칠이 됐다고 전한다. 그는 “조선의 식민지 권력과 일본의 관헌은 근대 천황제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타파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운동 중심의 사회운동과 더불어 일본이라는 국가의 중요한 존립 기반인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태롭게 하는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된 움직임을 철저히 봉쇄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조선 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는 ‘조선 형평사 제휴의 건’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려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형평사와 수평사가 교류와 연대를 놓고 끊임없이 모색한 것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새겨진 역사의 찬란하며 귀중한 한 장면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형평운동은 ‘경제적 조건을 기반으로 하는 인권운동’이란 평가도 받는다. 조미은(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형평사의 경제활동 내용과 성격’을 발표하면서 “형평사의 경제적 활동은 형평사 또는 형평운동의 가장 기본 목적과 활동인 인권운동과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는 “형평사원들과 일반인 사이에 경제적인 문제로 대치하더라도 일반인은 결국 ‘감히 백정들이 대든다’고 하는 등 신분적으로 형평사원들을 차별했다”고 말했다. 1926년 형평사 강령 중 “아등은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한 인권 해방을 근본적 사명으로 함”을 두고 “형평운동에서 인권문제와 경제문제는 병행해서 추진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목표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지역의 경제 여건과 신분제 상황도 형평운동과 연관된다. 김일수(경운대 교수)는 ‘형평운동의 지역성과 지역운동’에서 1923~1927년의 형평 사건을 분석했다. ‘사건 상황’은 경북 14건, 충남 12건, 경남과 충북 7건이다. 황해도와 평안도 등 북부 지역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점을 두고 우선 백정 인구 비중이 높은 남부에서 주로 발생했다고 말한다. 이뿐 아니다. “북부 지역은 성리학 질서가 남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다”고 한다. 그는 “황해도의 경우 성리학에 기반한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는 사회개혁 움직임이 왕성하였다. 19세기 말 황해도 지역민 3분의 2가 동학교도라는 말이 돌 정도로 동학의 교세가 강했다”고 분석한다. 경제 상황도 달랐다. 평안도는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능동적으로 움직인 지역이다.
일제 들개 사냥 동원도 거부하다
미즈노 나오키(교토대학 교수)는 형평운동을 오래 연구한 학자다. 그는 형평운동과 수평운동 교류에 관해 여러 글을 발표했다. 이날 주제는 ‘식민지 지배, 식민지 권력과 형평운동’이다. 미즈노 나오키는 ‘식민지 권력과 형평운동이 대립관계에 있다’는 그간 연구의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백정이) 도축, 식육 판매, 가죽 제조 등 식민지 지배하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존재였음을 고려할 때 형평운동은 탄압만 해두면 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특히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등과는 달랐다”고 했다. 이 말은 곧 “백정들에게 경찰 당국은 각종 영업(도축, 식육 판매 등)의 인허가 권한, 판매가격 결정 권한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에 영업을 계속하려면 경찰 당국에 요청·진정하고 협상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권력은 식육 판매, 우피 판매 중개 등 인허가권에 대한 형평사 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관공리의 백정 차별 해소 요구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미즈노 나오키는 “식민지 지배의 안정과 유지에 관련된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미즈노 나오키는 형평운동과 식민지 권력과의 관계에서 주목할 문제 중 하나로 들개 사냥에 백정들이 동원된 사실을 들었다. 백정에 대한 악감정을 더 불러일으킨 일이었다. 형평사는 창립한 1923년 ‘들개 박살 폐업’도 결의했다. ‘사람다운 대우’를 받기 위해 ‘사람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실제 여러 형평사 분사에서 일제 경찰의 동원을 거부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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